오시는 주님의 수고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2권 PDF전문보기

오시는 주님의 수고

예수의 수고보다 더 크게 남아진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예수의 수고는 2천년의 수고요, 모세의 수고는 80년의 수고입니다. 그러나 하늘땅이 굴복하고 사탄도 통곡할 수고가 있으니 하나님의 수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세계는 그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가정을 위한 수고를 하면 그 가정이 복을 받고, 민족을 위한 수고를 하면 그 민족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의 수고는 하늘땅을 잘 살게 하는 수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수고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요, 사람들의 수고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생하여 영인들이 울고 사람들이 울게 해야 인류에게 광명이 동터오는 것입니다. 고생을 해야 합니다. 내적, 외적, 환경적인 고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안다고 해야 할 때 모른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곡절을 발표하는 민족이나 교파가 있다면, 그 민족이나 교파는 세계를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로 찾아오실 것인가? 죽음의 고비를 넘은 곳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내용을 발표하여 공산당까지 울릴 수 있으면 그 힘은 공산당을 정복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소개하고 나서 천국을 말해야 정통입니다.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교가 이단입니다. 타락은 슬픔을 하나님의 가슴에 심은 것입니다. 아직 그 슬픔의 뿌리를 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슬픔을 말해 주어서 슬픔의 길을 걷데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쁨의 날을 맞이한 후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은 마지막 축복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슬픈 역사를 인류 앞에 소개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진리입니다. 심기를 하나님 앞에 심었기 때문에 거두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거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아직까지 심판하지 못하신 것은 아들딸의 입장으로 지으신 창조의 심정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고, 사탄 대해서는 당초 충신으로 지으셨던 그 기준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의 기준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심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부모의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참으로 주신 것을 참으로 받아서 참으로 심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님의 슬픔을 역사적으로 변증하여 시대적으로 체험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 고개를 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개인,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 천주가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치려고 했을 때, 이삭이 한마디만 항거를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가치를 알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축복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야곱에게 당장 무엇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세계에서 받을 수 있는 복의 최고 기준입니다.

모세도 궁중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벌판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쓸쓸한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도 민족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도 그랬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순교사는 있어도 하나님의 순교사는 없습니다. 최후의 진리는 하나님의 고통을 소개하여 예수까지도 통곡하게 하고, 지옥에 간 사람들까지도 통곡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 원리의 길은 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이요, 원리의 길은 밟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 본부의 사람들은 전체를 대신한 개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