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십자가를 지우느냐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6권 PDF전문보기

누가 나에게 십자가를 지우느냐

그런데 누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우느냐 할 때 내 개체에 있어서는 내 몸뚱이가 십자가를 나에게 지운다는 것입니다. '야, 하나님이고 뭐고 그 뜻이 언제 이루어진단 말이냐? 죽은 뒤에 천당이고 지옥이고 가는 건데 고생할 게 뭐냐?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나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제일 가까운 집안식구가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탕감할 수 있는 분량만큼 들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통일교인들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승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 너는 승리한 자격자다'라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승리한 개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환경적인 터전을 먼저 닦아야 됩니다.

창조과정을 볼 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에야 사람을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개인적인 십자가 뿐만 아니라 가정적인 십자가까지 승리한 후에야 비로소 섭리의 중심으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십자가를 합해서 지지 않고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핍박을 받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십자가와 가정적인 십자가를 한꺼번에 탕감하게 된다면 가정 완성을 위한 길을 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닦여지는 것이요. 내 개체는 완성의 기준을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4천년의 역사적인 탕감복귀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4천년의 역사적인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완성한 아들로서 오신 그가 핍박을 받아야 되었느냐? 그 개체가 미비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니요, 미완성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적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신랑 신부라는 상대적인 이념을 남기고 십자가를 지고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그 십자가의 탕감노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완전히 탕감조건이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탕감해 주어야 하느냐? 이 땅에 있는 신부가 대신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책임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즉 오신 신랑을 추방해 버린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신부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인 탕감을 재차 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계사적인 책임자로 오셨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복귀의 노정을 완결지을 때까지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은 개인적인 십자가로부터 가정적인 십자가, 국가적인 십자가, 그리고 세계적인 십자가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양면적인 십자가를 붙들고 몸부림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하나의 민족을 중심삼고 한 나라를 중심삼고 뜻을 세울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키우기 위해 그를 추방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 나라를 위해서 세움받은 사람을 그 나라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에게 그 나라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보다도 세계를 위하는 사명을 맡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작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지게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세계를 하루빨리 복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 민족은 세계로 흩어져서 탕감 제물의 역사를 엮어 내려왔기 때문에 유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