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이 되는 자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34권 PDF전문보기

본이 되는 자리

누구나 슬픈 것은 싫어합니다. 식구나 어려움이 자신과 관계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이 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 가정을 동정하게 됩니다. 동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을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행하다 할 때, 그가 불행하지 않은 입장에 가기 위해서는, 그 불행한 요건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행복한 자리는 어떤 자리냐? 언제나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는데 슬픔들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만유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본이 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떠한 자리에서 본이 될 것이냐? 슬픈 자리는 아닐 것입니다. 또, 악한 자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일 것이냐? 참된 자리요, 기쁜 자리일 것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무한히 행복한 자리일 것입니다. 그 행복은 유한권내의 한계선내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무한한 자리에서의 행복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지닌 사람이 이 땅에 있었느냐 하게 될 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자신은 어떠했느냐? 물론 만유의 본이 될 수 있는 분이라 하더라도 악한 세상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주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세상이 슬픈 것이기에 언제나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면 높던 입장이 낮아지게 됩니다. 물이 한 동이 가득 있더라도 퍼주고 나면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높은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슬픈 환경을 대하게 될 때는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고 나면 어떻게 되느냐? 그 자체가 기쁜 환경에 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왜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느냐? 주고 나면 반드시 어려운 환경에 부딪히고 기쁠 수 있는 내용이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이 감소된 것을 어떻게 보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보충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불행을 느낄 것이요,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낄 것이요, 말할 수 없는 고충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주고 나서 이것을 보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무엇이냐? 슬픈 사람을 위로해 주고 그 사람과 하나되어서, 그 사람에게 자기가 도움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를 슬픈 자리에서 보다 좋은 자리로 올려 주고 좀더 나은 자리로 끌어 주는 것입니다. 주고 난 후에 자기가 준 것을 보충받을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10 만한 자리에 있던 어떤 슬픈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20 만한 자리로 올라왔다면 자기 자신은 10의 내용이 감소되었지만, 그 사람은 10만큼의 올라온 내용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소된 것이 보강되면, 그 10이라는 내용은 자기로 말미암아 발전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손해나 감퇴가 아니라, 자기를 중심삼고 발전 현상이 벌어지게 될 때에는 그만큼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또, 100 만한 일을 계획했다고 해서 그 일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0만큼이 이루어지고, 20만큼이 이루어지고, 30, 40, 50, 60, 70, 80 이렇게 해서 100까지 그 이루어지는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소망하던 것이 점점 가까와지게 되고 그걸 보고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말씀의 제목처럼 본을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