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의 바른 태도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06권 PDF전문보기

신앙자의 바른 태도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고 이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분이었음을 역사 이래로 신앙자들 가운데에서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게 될 때, 예수님의 그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감돌고 여러분 자체를 휩쓸어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면, 이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불쌍한 이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슬퍼할 줄 알고, 하늘을 찾아나가는 교단들이 산산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자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역사를 대신하여, 현시대를 대신하여, 미래의 후손을 대신하여 슬퍼할 줄 알아야만, 여러분의 후손에게 이스라엘에 허락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인연의 조건이라도 지상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 시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여러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올 때에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인연이 맺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발길을 돌리려 해도 무엇인지 미련을 가지게 하는 인연이 여러분들을 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 나로 말미암은 인연이 아니라면 누구로 말미암은 인연이었던고. 피눈물의 역사를 해원하기 위해 세운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우리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존재의식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를 맞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북받치고 사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도 알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인적(人的)인 인연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뇨? 땅 위에서 슬픈 인연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여! 하늘의 슬픈 인연을 제가 다 탕감하겠사오니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슬픈 인연의 세계에서 남아지고 그 세계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모습이 되고 민족이 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는 수많은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마음에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무슨 뜻이었던고. 하늘의 슬픔을 탕감하는 노정에서 자기 일신의 죽음을 통해 어느 한계까지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중까지 연결되어 들어가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처참한 죽음의 길이 남게 되지만, 영적인 구원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죽는 것 정도는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