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과정에 있어서 비참했던 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8권 PDF전문보기

역사 과정에 있어서 비참했던 일

선생님은 원래 한국 교계를 중심삼고 출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단의 반박과 민족의 반박으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길을 걸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맨 밑에서부터 역사적인 운명의 길을 다시 더듬어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완전한 진리의 터전을 닦아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통일교회가 걸어온 노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통일교회가 역사 과정을 탕감해 나오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접붙이기 위해서는 처음에 만물을 조건삼아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조건삼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재림이상이 이루어지면 재림주님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사랑의 인연을 조건삼아 가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것은 말할 수 없이 탄식할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한 제물로 놓이게 된 만물은 더 큰 탄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만물 자체로 보면 타락권내에 있는 것만으로도 탄식할 일이지만 인간을 참되게 끌어서 해방의 한 날을 맞기 위하여 제물적인 입장에서 희생되어온 것 또한 탄식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해방의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물된 만물이 탄식하는 기준이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물된 만물과 일치되어 제물 없이도 살 수 있고, 또 제물 없이도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만물은 인간의 뒤에 가고 인간은 만물 앞에 내세워져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의 자리에서 양자를 거쳐 아들을 맞이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락하지 않은 아들이 나타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을 중심삼고 그 뒤에 있는 만물과 함께 해방권을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교단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만물이 제물의 기준에 세워진 것 역시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한 일들이 만물에게 탄식을 더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제물시대를 지났기에 유대 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제물 대신 서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 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그들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제물은 만물이 되어야 했지만, 그 당시 제물의 실체형을 갖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요, 유대 교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했던 것은 유대교단이었습니다.

제물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 앞에 희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꿀잡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제물이 되지 않고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제물이 된 것은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억울하고 비통하고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자기들 스스로가 타락해서 그처럼 슬픈 자리에 떨어진 것이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타의에 의해서 슬픈 자리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으로 보면, 아담과 해와가 스스로 타락해서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심정으로 보면, 아담과 해와가 스스로 타락해서 죽음의 자리에 나간 것보다도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나가게 된 사실이 하나님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의 심정에 있는 가장 큰 못 자국은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 과정에서 비참한 일 중의 제일 첫번째는 아담 해와의 타락이었으며 두번째는 예수님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귀역사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계를 대표한 입장이었고 유대교는 세계의 종교를 대표한 입장이었습니다. 동시에 유대교는 내적인 것을 대표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외적인 것을 대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안팎의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또다시 어둠의 길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는 영적 사망과 육적 사망의 두 골짜기를 거쳐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기독교가 영적인 골짜기를 차지하기 위해서 육적인 골짜기를 통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골짜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육적인 골짜기를 타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육적인 골고다 노정에서 영적인 골고다 노정으로 가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육적인 골고다 노정과 영적인 골고다 노정을 다 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길에 나선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슬픔의 기로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삶의 길을 걸어 나오기 보다는 좋든지 싫든지간에 죽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때에 이러한 한을 풀 것이냐? 이 한을 풀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가슴속에 남겨진 못 자국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슬픔과 눈물로 엉클어진 그 한의 근본을 해원성사하지 못하면 사탄은 '하나님이여, 아직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라고 참소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앞에 세우고 제물을 동원하여 땅 위에 영육을 통할 수 있는 주관권을 세워 행사하여야 할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고스란히 남아져 재림의 한 날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가는 끝날의 노정에는 탄식이 그들 앞에 놓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