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의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으려면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36권 PDF전문보기

열의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으려면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열의에 사무칠 수 있는 자리에 계시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응당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인간을 그 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능치 못함이 없는 주체이시기 때문에 열의에 있어서도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열의의 주체가 되어 계신다 하더라도 나 자체가 스스로 열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열의를 보급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순수하기에 우리 자체도 순수해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제3의 목적을 추구하게 될 때, 그 목적은 나와 더불어 영원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을 우리는 절감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삼각관계에 있지만 내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나와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체 내에 있는 그 목적의식을 얼마만큼 자각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자각의 감도가 열의로 화하여 열의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을 유도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력하여 열의의 도화선이 되는 길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일치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동맥이 있으면 하나의 정맥이 있어야 되고, 한 곳에서 주면 한 곳에서 받아야 되며, 백을 주면 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의를 유발시킬 수 있는 그 동기는 무엇이냐? 순수해야 합니다. 사(邪)된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백이 들어오게 되면 백으로써 순수하게 반영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열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발생하느냐? 순수한 것을 터전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열의를 얼마나 추구하느냐,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사모하고 얼마나 흠모하여 나 자체가 그 무한한 열의의 주체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움이 앞서야 되고, 간절함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있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열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 가운데에서 살고 싶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끝을 맺고 싶은 흠모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의 마음이 간절한 데서부터 순수한 바탕을 중심삼아야 하나님의 그 사랑의 인연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마이너스가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직행하는 힘을 정지의 모양으로 만들려면 직행하는 힘에 반대되는 하나의 힘이 있음으로써 직행하는 힘을 밀어내는 작용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플러스가 나를 향하여 직행하여 내 순수한 바탕 앞에 부딪치게 될 때, 내가 완전한 마이너스의 입장을 지니게 된다면 그 방향은 그 마이너스의 뒤를 따라올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제3의 힘의 작용이 미쳐짐으로 말미암아 현재 입장에서 전진적인 상태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작용체에 있어서나 운동법칙에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이런 자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새로운 열의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자기 자체의 무한한 가치를 정지시키거나 고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입장에서 연속적인 전진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대자 앞에 기여하는 바탕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정성들이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