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치중해서 사는 사람과 몸에 치중해서 사는 사람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74권 PDF전문보기

마음에 치중해서 사는 사람과 몸에 치중해서 사는 사람

오늘날 인간세계에는 5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50억 이 인류를 분석해 보면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있느냐? 마음을 위주로 해서, 마음에 치중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몸에 치중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것을 향해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높은 것에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면 높은 곳에 속하는 사람이란 어떠한 류(類)의 사람이냐? 보다 양심적인 차원의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게 될 때 `너 양심적이냐?' 이럽니다. `진짜 양심적이냐?'라고 대번에 묻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보편적 견지에 있어서 양심적인 사람은 우(右)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로 어떻게 가느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로 가는 데는 참된 방향을 찾아야 됩니다.

그것은 180도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180도의 다른 방향이 있다 그겁니다. 180도의 다른 방향 가운데서 양심적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그 기준은 180도권 내의 수직을 향하여 가려 하는…. `마음이 곧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곧다, 그 곧다는 것은 뭐냐? 180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여기의 한 각도가 180도의 상반구(上半球), 상현구(上弦球)에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아래 위를 꿰뚫는 수직을 표준해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이냐' 하는 말은 `너 수직에 서 있느냐'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을 둘로 나누게 될 때에는 양심적인 사람과 물질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화도 이렇게 갈라집니다. 그러면 인간이 제일 가까이 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물질입니다. 먹고 살아야 되거든요. 일상생활에서 동서남북을 아무리 순회한다 하더라도 나날이 필요한 건 물질이예요. 물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 인류 가운데는 물질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합해 가지고 물질 제일주의로 가기 때문에 그 결과의 세계는 물질문명의 세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을 위한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패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양심적인 삶이, 정신을 위주로 하는 삶이 인생의 참모습이기 때문에 양심을 중요시하는 문화창건의 노정이 역사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제거하고, 물질을 멀리하면서 정신 제일주의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 제일주의로 나가는 데 물질을 동반해서 가면 좋지 않으냐 이겁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종교적인 세계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문제가 됩니다. 그건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됐기 때문이예요. 잘못된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잘못되지 않은 하나의 중심을 찾는 것입니다.

그 중심점에 서 가지고 변치 않는, 상하로 연결할 수 있는 수직선을 마련해야 그 수직에 따라 수평선이 그어집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90각도를 중심한 자기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거예요. 위치 결정이 성사 안 돼 가지고는 모든 방향감각은 혼란이요 파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실제 생활의 모든 현상을 미루어 봐 가지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는 이것이 문제가 돼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종착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고, 정신문명이 주장하는 하나의 종착세계가 있다 이겁니다. 이 둘이 왜 갈라졌느냐? 이게 철학에서 문제가 되고, 종교에서 문제가 됩니다. 종교 때문에 갈라졌다면 책임이 인간에게 있느냐, 신에게 있느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지금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지금까지 물질이 정신을 배척하려고 했지만 배척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한 때이고, 정신이 물질을 배척하려 했지만 배척할 수 없는 때에 도달했습니다. 한 때에 있어서는 서로가 배반했지만 한 바퀴 돌아와 가지고는 붙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개의 바퀴가 돌고 있는데 그게 같은 방향으로 돌면 좋겠는데, 반대 방향으로 돌게 되었다구요. 이게 문제예요. 거 왜 반대로 돌게 됐느냐? 이것이 심각한 문제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상적 본연의 기틀이 본래부터 하나의 결합된 이상적 모체의 핵의 원 중심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못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치형(相馳形)으로서 둘이 반대로 돌수밖에 없는 현상을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두 힘의 작용―여기에서 이원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이 미쳐졌다 그겁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이 우주의 형성도…. 요즘에는 우주도 하나의 목적의식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시대에 들어왔다구요. 이 우주가 돌고 도는데 제멋대로 도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가 가야 할 궤도를 따라 돕니다. 멀고 큰 궤도지만 변치 않는 궤도를 중심삼고 자기 스스로 매일같이 공전(公轉)해 나갑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과 생애가 있는데, 생활과 생애는 달라요. 생활은 나날을 그려 가는 것이지만, 생애라는 것은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시대를 거쳐가는 거예요. 그런데 생활의 목적과 생애의 목적이 상치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오늘의 생활은 영원을 잇기 위한 하나의 세포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길이로 보게 되면 1밀리미터라는 것은 킬로미터에 연결시키기 위한 하나의 단위입니다. 1밀리미터를 거치지 않은 1킬로미터의 완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도 아무리 세분되어 가지고 스스로 돌고 있는 게 작다 하더라도 그 도는 것이 십 배, 백 배, 천 배, 만 배가 되고 몇만 배가 되더라도 맞아떨어지는 것은 큰 목적에 상치(相馳)되는 것이 아니고 큰 목적에 흡수, 통일될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