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참부모와 맺어진 인연의 강도(强度)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지상생활과 영계

④ 참부모와 맺어진 인연의 강도(强度)

참부모는 인류가 찾아야 할 참된 부모입니다. 그 참부모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는 분입니다. 참부모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과 구렁텅이를 메우기 위한 하나의 제단이요, 사망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과 내가 같이할 수 있는 자리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초점입니다. 즉 타락으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하나님과 다시 하나 될 수 있고, 갈라졌던 두 경계선이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됩니다. 탕감제물의 입장에 서신 분이 참부모입니다.

우리가 절박하게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이 천 년 사연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고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는 인류가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분이 참부모입니다. (31-74, 1970.4.19)

그러면 참부모를 자신에게 무조건 인연지어 주신 하나님께 무엇으로 감사할 것이냐?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를 드렸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준 그 은혜에 환희로 화답하면서 승리를 다짐해야 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얼마나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한한 소망을 가지고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재출발한다는 생각을 얼마나 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들딸을 찾아 나오신 역사적인 소원이 참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참부모를 얼마나 동경해 오셨던가? 그런데 참부모를 동경하는 기준과 사망세계에서 구원을 동경하는 우리의 기준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참부모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참부모와 함께할 수 있고, 참부모와 인연 맺을 수 있고, 참부모와 상봉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대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리를 내가 가고, 그런 승리의 기반을 내가 닦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그 자리를 내 생애의 가치를 좌우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또 그 인연을 내 생애의 원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얼마나 거짓되고 흘러가는 바람결처럼 자리를 못 잡고 방황했는가 하는가를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주는 어떤 분이냐? 참부모의 인연을 갖춘 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참부모의 인연이 얼마나 놀라운 인연입니까? 참부모로 말미암아 내 참된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요, 새로운 생명이 인연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이 출발되는 것이며, 새로운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 년의 모든 생사의 길을 해결지을 승리의 요건이 갖추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야 할 분이 아닙니다. 타락한 세계를 대해야 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의 인연을 들고 나오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복귀의 터전을 마련해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나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방이 일치할 수 있는 인연이 한 기점에서 연결되어 사망의 세계를 폭파하고 새로운 광명천지의 기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1-75, 1970.4.19)

참부모와 여러분의 인연은 어떠한 칼이나 권력을 가지고도 끊을 수 없고, 사탄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 이 인연은 오늘의 모든 문제를 돌파하여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승리의 특권을 갖고 있는 인연이요,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소망해 온 힘이 결집되어 있는 본거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시대적인 힘을 결집시켜가지고는 역사적인 힘이 결집된 이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인연을 갖추어 승리를 위한 출발점에 하나님이 역사적인 제물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입니다.

하나님이 심각한 자리에 계시면 나도 심각한 자리에 가고, 하나님이 딱한 사정에 계시면 나도 딱한 사정에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정이 나의 사정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해 하나님을 위로해드리는 사람이 이 땅에 나오지 않고는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어려운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의 동정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동정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인연을 따라 나온 역사의 결정체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이 그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참부모는 역사적인 소원의 집약체입니다. 하나님이 전체를 대신한 역사적인 실체로 내세운 분이 참부모인 것입니다. (31-76, 1970.4.19)

참부모와의 인연은 영계에서부터가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연결되어야 합니다. 참부모는 실체를 갖추어 지상에 오시기 때문에 내가 부르면 대답을 할 수 있고, 내가 어려운 자리에 있으면 동정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면적인 도상에서 참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려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승리의 왕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심정에 일체가 되어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자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같이 있다고 하는 신념, 참부모와 더불어 있다고 하는 신념이 생애노정의 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방향에서 동요함이 없이 천년만년 지탱할 수 있는 자아가 되어야만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곧 천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이요, 지상의 주인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천상천국과 지상천국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은 편안한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극난한 자리, 그 이상 없는 심각한 자리, 죽느냐 사는냐 하는 와중, 가일층 모험하는 자리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착오적인 말 같지만 이렇게 가는 것이 복귀의 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심정의 세계를 밟아가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자세요, 정상적인 태도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지를 추구해 가는 자신임이 분명할진대, 내가 가는 길은 참된 노정이 되는 것입니다. (31-78, 1970.4.19)

여러분, 이제 사십이 넘고 오십이 다 된 사람이 많은데,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10년, 20년 이내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았을 때 뜻을 알고 나왔던 과정을 돌아보고, 내가 악마의 후손으로 남겨진 세계 인류를 복귀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직까지 자리를 못 잡고 종과 같이 한스러운 탈을 벗지 못했다고 생각될 때, 영계에 들어가서 어떻게 얼굴을 들겠습니까? 어떻게 거기에 가서 자기 자세를 갖추어가지고 다닐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냥 박혀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백일하에 100퍼센트 밑창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계에 안 갈 수 없습니다. 다 가야 됩니다.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가난한 집 딸이 자기의 초라한 모습만 보더라도 문중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데, 혼수도 못 갖추고 그 형제 일족만 해도 백 명에 가깝고 층층시하 4대조가 모여 사는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맨손으로 가서 그 조롱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우리 집 전통에 의하면 누구는 이랬고, 누구는 이랬고, 할머니 아줌마 전부 다 이랬고 우리 누나도 이렇게 이렇게 하고 다 그랬는데…` 하게 될 때, 거기에서 낙제생 같은 신세를 해가지고 얼굴 들고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숟가락을 들 수 있느냐, 젓가락을 들 수 있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축에 못 끼면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가지고 갈 겁니까? `통일교회 40년 믿었다면 뭘 가져 왔소`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영계가 여기보다 못한 곳이겠습니까, 나은 곳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죽었을 때 가는 곳이 여기보다 못한 곳이겠습니까, 여기보다 나은 곳이겠습니까? 천만 배 나은 곳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영계는 내가 어떠한 자리에 있다 하는 비통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한 단계 올라가려면 몇천 년, 몇만 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212-224, 1991.1.6)

여러분은 축복이라는 귀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문은 열려 있지만,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을 못 입었습니다. 잔칫집에는 예복을 입고 가야 합니다. 신랑의 들러리로 가는데, 노동복 입고 가서 되겠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맞는 단장을 하고 그 자리에 가서야 그 환경의 환영을 받지, 그렇지 못하면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아, 저리 비켜!` 하는 것입니다.

옛날 목포에 부자가 있었는데, 목포 북부 지방의 땅이 전부 그 사람 것이라고 할 만큼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친구가 그 사람의 외동딸과 결혼해서 그 집의 사위가 됐습니다. 그때는 왜정 때이기 때문에 결혼식을 하더라도 지금처럼 모닝코트를 입고, 예복을 입고 신식 서양식 결혼을 못했습니다. 국방복 입고 가슴에 꽃 하나 꽂고 결혼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부자에다 한다 하는 친구가 많으니까 신식 결혼식을 시켰습니다. 그때 선생님을 포함하여 네 사람이 신랑의 들러리로 갔습니다. 들러리의 옷을 신부집에서 준비했는데, 들러리가 모두 자기 사위와 같은 줄 알고 신랑의 키에 맞췄습니다. 선생님 키가 신랑과 같지만 신랑은 선생님같이 몸이 뚱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맞췄다는 와이셔츠가 단추를 채워도 배꼽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조이는 옷을 입고 등골에 잔뜩 힘을 주다 보니 나중에는 쥐가 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큰소리할 수 있습니까? 바람벽 있는 데로 가서 엎드려 쥐가 난 걸 풀던 생각이 납니다.

전라남도에서 한다 하는 이름 있는 사람은 다 모여든 그 대중 앞에서, 몇천 명이 모인 그 판국에서 들러리가 그러고 있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는 것이 쉽지, 거기 앉아서 배기지 못하겠더라 이겁니다.

축에 못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선생님이 영계를 잘 알고, 성자들이니 뭐니 하는 잘났다는 교주들을 다 아는데, 너희들한테 질 수 없다 이겁니다. 그 축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12-226, 199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