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시던 때와 환경을 남기고 간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09권 PDF전문보기

바라시던 때와 환경을 남기고 간 예수

예수는 갔습니다. 어떻게 갔느뇨? 사명을 갖고 왔다가 모든 것을 남기고 갔습니다. 남기고 갔어요. 예수가 찾고자 했던 그 때를 남겼고, 예수가 보고자 했던 그 환경을 남겼고, 예수가 행사하고자 했던 그 주권을 남기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래도 하나 되고 저래도 하나되라. 때가 이르면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밝히 이르리라'하셨습니다. 예수는 때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원수 앞에서 자기가 만왕의 왕으로 왔다고 말하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있는 이스라엘이 배겨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으나 때를 말하지 못하였고, 환경을 닦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바라던 무리들이 해야 할 행동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1 이스라엘이 세계적인 사명의 발판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때를 남기고 가신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그분이 소망으로 남기신 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의 입장에 있는 세계 기독교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고? 알아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는 옛날의 유대교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원수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아 죽였잖아요?

여러분들, 예수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를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자랄 때에도 몇 번씩이나 천륜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은 후 기르며 젖을 먹일 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고 하나님이 택한 귀공자인 줄 알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마음이 퇴색되어 예수를 보통 아이와 같이 대했습니다. 예수는 요셉 가정에서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심정의 왕자로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깊이에는 때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한 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한 환경을 위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또는 인격적인 분야에 있어서나 갖출바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 혹은 만민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때를 고대했던 것이다.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생각해보십시오. 열 두 살 때에 부모 몰래 성전을 찾아간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 앞에 증거해야 할 그의 형제들까지도 희롱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가상적인 역사형의 인격자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병자의 친구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하고 하였는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왜 그랬겠느냐 이겁니다. 그걸 생각할 때 여러분은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겠는가?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이 자기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당신은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며 경배해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손가락질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유린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욕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죄인의 친구가 되고 세리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이루어 놓은 제단이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제사장은 대심판 때에 첫번째로 불리어 심판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를 맹목적으로 믿었어요, 맹목적으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으니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하고 간단하고 쉽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먹지 못하고 입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먹으려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겠습니까? 편안하고 태평스럽고 배가 불렀던 예수가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세가 이렇게 폭락될 줄이야….

본래 예수는 예루살렘 성 앞에서 빌라도와 가야바의 머리를 밟고 '이놈들아'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단결하여 죽이려할 때 폭동이라도 일으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서 벌벌 떨던 빌라도 앞에 이스라엘 제사장 전부가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가 되었다면, 60만 명을 이끌어 나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의 채찍을 주어 역사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앞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를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또한 환경을 잃어버린 예수였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과부의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오늘날 같이 자연스러운 때 그랬던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에 그랬단 말입니다.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항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얼마나 안타까왔겠습니까? 그런 자리에까지 쫓겨난 예수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4천년 역사가 유린되어 들어가는구나. 여기가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를 흘리며 닦아 놓은 역사적인 터전이 무너지는 자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으나 입을 봉한 예수였습니다. 저주를 하면 4천년 동안 수고하였던 하나님의 수고가 끊어져 나가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 온 터전이 무너져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입을 다무셨습니다. 예수는 슬프고 어려울 때마다 홀로 감람산을 헤매며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을 헤매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그 시대에 철석같이 세워 놓고 가야 했는데,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의 인격관이 어떠하다고 뚜렷이 말할 수 있어요? 막연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이념을 갖고 와서 이 땅을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때와 환경을 정리하여 이러이러하게 지배했다고 해보았습니까? 못 해보았습니다. 패배자로 사라져 간 예수입니다.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3년 동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 끌고 다니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는 다 불신했어요. 3년 동안 있는 정성을 다하고 피살을 깎고 희노애락을 같이하면서 길러 놓은 제자가 그 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가고 제자는 제자대로 가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는 다 남겨놓고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