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목적이었고 희망이었던 예수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5권 PDF전문보기

모든 것의 목적이었고 희망이었던 예수님

그 메시아가 오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를 결정하려고 하는 기반 위에서 있는 그 민족권 가운데 메시아는 오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희망하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의 모든 사람의 주체로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모든 것의 목적은 그분이었다. 모든 것의 희망이 그분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오신 중심은 그분이었다. 그리고 어버이가 자식들을 당시까지 끌고 나온 역사적 선한 규범도 그분과 관계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적 외적 심정을 가지고 지상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한복판에 서서, 역사의 부름에 응하고 시대의 요구에 응하고, 미래는 자기가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가운데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중대한 사명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자기 개인 중심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영계에 있는 수많은 조상들의 희망이 자기에게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몹시 황폐한 이스라엘 민족의 그 시대의 상태를 최후로 하여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단계를 넘기지 못하면 자손은 비참한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사탄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참소를 통하여 역사의 제물이 되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우주적인 사명 가운데 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런 심정을 품고 공적 생활을 출발하기 전까지의 내적 준비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 이것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 당시의 예수님에게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의지하러 온 대중, 그들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은 역사를 인계해서는 산 역사를 건설할 수가 없다. 환경이 없으면 존재의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의 결정 기준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지상의 사정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지상에 선한 희망의 기준을 세우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만들어 오신 민족의 선한 환경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일개인의 관계가 아니고 역사적 관계인 것이다. 세계적 관계인 것이다. 미래적 관계인 것이다. 그것을 맺으려고 3년 노정에 나설 때의 예수의 내적 결의는 어떠하였던가. 그것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제자들도 몰랐었다. 아는 이는 하나님뿐이었다.

하나님이 희망하는 최고의 위치에 섰다고 하는 민족이 가는 방법도 몰랐다. 방법과 목적하는 기준이 일치되지 못하면 목적 완성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한 사람밖에 없는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 최고의 영광의 입장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되는 것을 하나님을 바라셨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 구주로서 오신 것이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은 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 하나님은 안 계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서 그런 방법, 그런 방식이 아니면 구원의 길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천운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신앙의 기준, 희망의 기준, 심정의 기준에 일치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을 희망하시고 세례 요한을 보내셨던 것이다.

역사를 인계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제물을 바쳐서 승리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권(歷史圈)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했던 관계로 온갖 조건에 걸려 있어서 당하는 모욕을 하나님 혼자서는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된다면 6천년간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목적인 복귀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원칙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려면 반대의 것 이상의 좋은 부분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잡아도 사용할 방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