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에게는 극단적으로 비참한 자리도 필요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0권 PDF전문보기

신앙자에게는 극단적으로 비참한 자리도 필요

여러분은 살기는 살았는데 뿌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는 노송나무가 폭풍우를 맞아 홍수에 밀려 벼랑이나 언덕배기에 간들간들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소나무든 오리나무든 미류나무든…. 그런데 폭풍우가 계속 몰아치던 나무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 나무가 비가 멎기를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바라겠어요, 안 바라겠어요? 여러분들은 생명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바란 때가 있었습니까?

그 이상 비참한 것이 어디 있어요? 뿌리만이라도 살아 있으면 소망이 나있을 텐데 이것은 뿌리가 다 썩어져 가지고 이미 물렁물렁해진 무우와 같으나…. 그런 무우 꼭지에는 잎이 붙어 있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썩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뽑아 주더라도 그것은 전부 다 외양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격입니다. 지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는 언덕배기에 딱 매달려 있고 몸뚱이는 바닷가로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살겠다고 하니 처량해요, 안 처량해요? 이래 가지고도 좋다고 춤을 춰요? 그가 아무리 생명력을 자랑할지라도 솟구쳐 올라와 위에 있는 벽에다가라도 뿌리를 박지 않으면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뿌리를 찾아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를 다 뚝 잘라 버리고 뿌리에서 새로 돋아난 가지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싹이 나오려면 지금까지 있던 나를 잘라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종자라고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잘라 버리면 큰일난다. 나는 살아야 된다'고 하다가는 전부 다 흔적도 없이 망하게 됩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큰 배를 바라볼 때, 물결이 높아 돛대가 안 보일 적에는 배가 물속에 들어간 줄 알았다가 다시 보일 때는, 휴하고 한숨부터 나오지요? 어때요? 실감나요? 보는 것도 그런데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기관장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어요? `너 잘 만났다' 그럴까요? 들어갈 때는 가슴이 철렁해 가지고 `아이구 하나님 나 죽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불렀겠지요? 파도 밑으로 내려갈 적마다 `하나님!' 하고 부르고 올라올 적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에게는 그런 전력(前歷)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인 비참한 자리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며 조롱을 받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 자식아. 네 꼴이 뭐냐? 이 목수의 자식'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그들과 같이 욕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보고 이 자식아 한다면 야단나겠지만 그때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전부 다 여러분들만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줄 알아요?

수천년 동안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왔다는 작자가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이동네로 저동네로 몰려다니고 쫓겨다녔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유대교인들은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무친 심정을 이어야 할 아들의 입장에 있었기에 핍박받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습니다.

몰리고, 매맞고, 구박당하고, 조롱받는 그것을 삼킬 수 있는 예수님을 볼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인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그것을 몽땅 받아들였습니다. 용자의 모습을 갖춘 장군이라면 이왕 죽을 바에야 소총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원자탄에 맞아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민족적인 저주와 조롱이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천륜의 길은 너희들이 아무리 해도 혼란시킬 수 없고 막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느끼며 싸워 나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알고 있어요. 누구 말을 듣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보니까 그렇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