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고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2권 PDF전문보기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고

일본 유학시절에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창굴에 있는 아가씨들의 과거를 캐보니 보통 사람의 과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회 환경에 몰리고 그 흐름에 따라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기도 했고, 혹은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이 버린 바 되어 거리에 밝히는 그런 여인이 될지라도, 쓸쓸히 사라지는 불쌍한 아낙네가 되더라도 자기 부모와 형제를 살리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섰다고 했을 때, 그들의 손을 붙들고 통곡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이런 비참한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의별 인간들이 다 거쳐나가는 그런 류의 생활 이면을 알지 못하고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빈민굴 생활로부터 밥을 얻어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길이길이 세우고 싶었던 그 사연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선생님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1941년도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부산을 향해 서울역을 떠날 때 서울 장안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한강변에 가면 불쌍한 이 민족이 해방되는 한 날을 위해 눈물 흘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이 민족은 아직도 불쌍한 민족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남모르는 가운데 눈물로서 하나님께 호소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천지 앞에 하늘의 사연을 폭로시키고 피를 토해서라도 호소해야 할 때가 오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흑석동의 고갯길은 선생님이 많이 걸어다닌 길입니다. 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는 전차를 안 타고 다녔습니다. 전차를 타고도 꽤 먼 곳이었지만 걸어 갔다가 걸어 왔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흑석동 고개를 넘어갈 때 보면 길가에서 적선을 바라며 행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남겨 두었던 그 돈을 주곤 했었습니다. 한번은 그들을 붙들고 한없이 울어도 봤습니다. 부모가 있느냐고 물어 보니까 없다고 하고, 형제가 있느냐고 물어 보니까 없다고 하는 그를 선생님이 그의 부모 형제를 대신해서 위로해 주지 못하는 것을 놓고…….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올 때 어떤 사람은 중앙청 쪽에서부터 혹은 종로나 동대문 쪽에서부터 남대문을 거쳐 걸어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선생님이 소년시절에 오뉴월 삼복지경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다녔던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전차나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편히 오더라도 지난날 선생님이 걸어다녔던 기준을 생각하고, 선생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린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누구한테도 얘기 안 했습니다. 말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선생님이 학생시절에 기도를 할 때는 목이 메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왜 그렇게 기도를 하는지 그 이유는 몰랐습니다. 20세를 전후한 청년이 목이 메어서 기도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저 청년은 왜 저렇게 기도할까? ' 하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거기에는 남 모르는 내적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