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부정하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9권 PDF전문보기

모든 것을 부정하라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과 사람이요 종교인들은 그런 것이 중심으로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냥 그대로 포괄된 자유 환경에서 새로운 도약의 희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없다, 그냥 그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버려야 됩니다. 버리는 데는 내가 부정해야 되느냐 저쪽에서 나를 부정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저쪽에서 부정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여기에 고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이니라(마 10: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무릇 자기 목숨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고 말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두고 볼 때에 이것은 전부 역설적인 논리입니다. 순응의 여건을 우리 환경권내에서 절대로 긍정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네 집안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으니, 그는 세상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질은 사망의 동기가 된다고 가르쳐 주었으니, 사망의 그늘을 대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종교인의 입장은 물질 앞에서는 비참한 입장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환경을 끊고 떠나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냐? 그러나 비참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비참함이 나를 파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해방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단호히 그 길을 취하여 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욕망이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이냐 할 때에 하나님도 역시 사람을 바라고 만물을 바랄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님 자체는 무엇을 바라느냐? 하나님 자체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권내에서 바랄 수 있는 소망의 기준이 있다면, 인간세계에 대해서 구도의 손길을 펴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에게 소망과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은 이 인간세계의 욕망을 대상적으로 둬야 되기 때문에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될 때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질도 필요로 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사람에게 이것을 거부하라는 조건을 제시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과 상관되어 있고 인연되어 있는 입장이라면 그럴 수 없는 것인데, 인연은 되어 있고 상관은 되어 있지만 그 인연과 상관을 다시 돌이켜 새로운 차원에서 맺고자 하는 어떠한 내적인 욕망과 염원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는 그 욕망의 길을 설정하기 위해서 부정적 요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자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대해 얼마만큼 부정하라는 것이냐? 오늘날 인간끼리 관계되어 있고, 그런 인연을 통하여 관계된 생활환경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얼마만큼 부정하라는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한계를 남기고 부정하라는 것이냐? 한 50퍼센트 정도 남기고 부정하라는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만큼 부정하라는 것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 이것은 어떠한 내용을 남겨 두고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절대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욕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인간들 앞에 죽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처해 있는 환경과 다른 환경에 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한계선이 무엇이냐? 죽음입니다. 죽음 이상의 자리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으면 끝나는 것이냐? 죽는 데도 문제가 다를 것입니다. 죽는 데는 먹고 살다가 늙어 죽기 며칠 전에 가서 죽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늙어서 죽으라는 말이냐? 아들딸 다 낳고 해볼 것 실컷 다 해보고 나서 `아 이젠 뭐 이만했으면 난 죽어도 괜찮다' 하는 그런 사용불능한, 무가치한 입장에서 죽으라는 말이냐? 어떤 사람들이 `천당가려면 늙어서나 천당가려고 종교를 믿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왕왕 보는데, 그렇게 늙어서 필요의 한계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죽으라는 말이냐? 그럼, 무식한 자리에서 죽으란 말이냐? 천태만상의 내용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년 시대에 죽으란 말이냐? 청년 시대, 소년 시대,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죽으란 말이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은 아무 의욕 없이 될 대로 되라 하는 인간상을 중심삼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욕망이 최고도에 달한 때, 희망에 벅차서 내일을 기약하며 계획된 목적을 성취하고 말겠다고 하는 혈기 왕성한 때, 여러분이 좋다고 하는 청년 시대보다도 청소년 시대, 청소년 시대에서도 아무때가 아니라 사춘기 시대, 희망에 벅찬 그때에 그걸 몽창 버리고 죽으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