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받들어 모셔야 했던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6권 PDF전문보기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받들어 모셔야 했던 예수

복중시대부터 맞이해야 할 메시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안나 할머니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했습니다. 메시아를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예수를 복중시대 때부터 안 사람이 안나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래, 안나 할머니가 알았으면 정성껏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껏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맞기를 고대하면서 일생 동안 성전을 지키면서 기도한 할머니라면 마리아를 만나 그 사실을 알았던 그때부터 마리아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종이 되어야 됩니다. 그가 어려울세라, 고통받을세라, 그 환경을 전부 주선해 가지고, 자기의 친척까지 동원해서라도 환경을 개척했어야 됩니다. 그랬으면 이스라엘의 인연을 상속받아 가지고 그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재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증거는 했지만 받들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또, 동방박사 세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복중에 있을 때는 모시지 못했지만 난 후에는 와서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하고는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동방박사들 어디로 갔노? 목자들 어디로 갔노? 안나는 어디로 갔어요? 다 가 버렸습니다. 다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정성들이고 하나님과 일문일답하여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지도받는 특별한 선지자들이 있었던들 그 선지자들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마리아는 10개월 동안, 그가 자라는 기간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목수 일을 할 게 뭐예요, 목수? 생각해 보라구요, 예수가 목수 일을 해서 되겠는가? 예수가 목수를 해서 되겠느냐 말이예요.

예수가 바라보는 그 시선은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본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 가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가 찰 때까지 스스로 준비하려니, 환경을 떠날 수 없는 예수였기 때문에 요셉 가정을 근거지로 하고 터전을 닦기 위한 수고를 여러 차례 했었지만 그 가정이 받들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집을 나오게 되어 3년노정을 떠난 것입니다. 집에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예수는 집에 대해서 한이 많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상을 갖다 놓고 믿고 하지만, 저나라에 가 보라 이겁니다. 예수님이 한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자기의 모친이 포도주가 없다고 말할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륜을 배반하고 민족적인 사명과 소망을 전부 전복시킬 수 있는 동기를 내포하고 있는 장본인이 어머니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때려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나 혼자 남아 가지고 이런 일을 해 나왔습니다. 어느누구 한 녀석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라는 겁니다, 누가 깨져 나가나. 부딪치는 날에 누가 깨져 나갈 것인지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맞고 나간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맞았고, 가정적으로 맞았고, 종족적으로 맞았고, 민족적으로 맞았고, 국가적으로 맞았으니 나도 맞는다 이겁니다. 맞지만 때가 오니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는 것은 내 개인을 위해 참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을 풀고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나라를 못 가졌기 때문에 내적으로 깊은 자리에서 위로할 수 있는 터전을 찾기 위해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몰릴 적마다 예수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고, 하늘의 곡절에 부대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고빗길이 여기에서 맺히고 풀릴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참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연은 하나님에게도 그러하고 예수님에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