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복귀섭리역사는 참부모를 찾기 위한 역사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참부모

④ 복귀섭리역사는 참부모를 찾기 위한 역사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나타나셔야 할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사탄세계와 싸워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을 수습하고, 인간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을 궤멸시켜야 하며, 영계와도 대결하여 수많은 영인들까지 주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를 구축해야 할 분입니다. 참부모에게는 그런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로부터 인간, 하늘까지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참부모를 보낼 수 있는 길을 닦아 나오신 것입니다.

참부모가 나타나시기 위해서는 참된 아들딸이 있어야 하고, 참된 아들딸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참된 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귀역사 노정을 보면, 종의 시대를 거치고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부모의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종의 시대로부터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부모의 시대까지 복귀해 나오는 동안 영계에 있는 영인들도 협조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한 국가의 기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발판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참부모가 이 땅에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을 거치는 2천 년 섭리역사의 기간이 있은 후 야곱으로 하여금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을 통하여 국가를 형성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까지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 오면서 수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입장에서 하나님 대신 사탄과 대결하여 이겨야 하고,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 대신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하고, 직계 아들딸의 입장에서도 하나님 대신 사탄세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부모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섭리역사는 구약시대로부터 신약시대를 거쳐서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거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 입장을 복귀하고 양자의 입장을 복귀한 터전 위에서 직계 아들딸의 입장을 복귀하여, 즉 승리의 기반을 닦아 놓은 후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13-281, 1964.4.12)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준비하신 종의 기반이 무너졌고, 양자의 기반도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종의 입장에서 싸워 승리하시고, 양자의 입장에서 싸워 승리하셔서 직계 아들의 입장으로 나아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양자의 입장과 직계 아들의 입장을 거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참부모의 인연을 세워 놓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셔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기준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지 못하고, 영계를 중심하고 참부모의 인연을 개척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개인적인 자리, 가정적인 자리, 민족과 국가적인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늘의 뜻을 대하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세워서 지금까지 돌고 돌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적인 시대를 맞이하여 하늘은 기필코 약속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신랑 되시는 주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를 택하셔서 참된 승리의 기반을 닦으실 것입니다. 참부모의 자리는 본연의 창조 목적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닦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6천 년 동안 싸워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천 년 복귀섭리역사는 이 참부모를 찾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참부모는 6천 년의 섭리사 전체를 대신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참부모를 찾지 못한 것이 인류 전체의 슬픔이었고, 고통이었고, 비애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류역사는 무슨 역사냐 하면, 참부모를 복귀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부모를 복귀하지 않고는 참된 자녀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참된 자녀의 인연을 세우기 전에 참된 가정과 참된 종족과 참된 민족·국가·세계·천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참부모의 영광으로 오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부모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즉 참부모는 역사적인 결실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역사적인 결실체로 서시기 위해서는 일면적인 승리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사명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육적으로는 아들의 입장을 복귀하는 노정을 거쳐 나가야 했고, 영적으로는 부모의 입장을 복귀하는 노정을 거쳐 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양면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기점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기점은 개인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가정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국가적인 이스라엘의 기반이 되고…. 이렇게 되었더라면 영적·육적으로 참부모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준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13-282, 1964.4.12)

본래, 참부모는 창조원리로 보면 영적·육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해서 참부모가 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계에 가셔서도 참부모를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영적인 부모의 입장을 복귀해야 되고, 육적인 부모의 입장을 복귀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영계에 가셔서 무엇을 하셨느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영계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고 유린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사회·국가·세계적인 기반을 닦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영계에서 섭리해 오셨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부 영적인 부모와 인연을 맺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상속받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영계에서 닦아 놓으신 영적인 개인·가정·국가·세계적인 기반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런 입장을 거치지 않고는 참부모의 인연을 이 땅에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영적인 상속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 영적인 기반을 상속하시게 될 때, 지상의 기독교인들이 그 다시 오시는 주님과 하나 되면, 지상에서 상속의 기준이 닦아질 수 있을 것인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준을 세워 놓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승리의 터전이 오시는 참부모 앞에 고스란히 옮겨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다시 오시는 참부모님은 재차 영적인 상속의 기준을 복귀하고, 육적인 상속의 기준을 복귀하는 투쟁의 역사를 거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6천 년 동안 섭리하신 것은 오시는 참부모의 터전을 마련하고 당대에 승리의 기반을 닦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인 부모의 명령에 일치단결하여 따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명령에 보조를 맞추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예수님이 닦아 놓으신 영적인 기반이 다시 오시는 주님께 상속되는 기준이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시는 주님, 참부모가 되실 분은 다시 영적인 세계에서 개인적인 시험으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적인 시험을 당해야 합니다. 그 시험을 이기지 않고는, 내적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지상에 실체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울 수 없기에 내적인 싸움을 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283, 1964.4.12)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왜 하시느냐? 본연의 부모, 즉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참부모는 어떤 분이냐? 참부모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실체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실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가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알기를 자기 집의 장롱 속에 들어 있는 패물보다도 못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22-44, 1969.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