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영적 체휼의 과정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지상생활과 영계

④ 영적 체휼의 과정

우리가 신앙의 주체 되는 하나님을 흠모하는 그런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호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주체가 확정돼 있지만 내가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살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주체로부터 살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살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살펴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몸을 중심삼고는 이것을 살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살펴야 됩니다.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을 볼 때 그 마음 자체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전부 다 같으냐? 그 바탕은 같을지 모르지만 마음 자체는 소성(素性)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전부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 얼굴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도수를 그릴 수 있는 평형선과 수직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도수를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늘이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주체 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상으로서 감응할 수 있는 바탕을 반드시 주었기 때문에 평면적인 마음 바탕의 기준 앞에 수직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선을 보게 된다면, 이건 평면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수직으로 서게 되면 이 수직선의 기준이 전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점기준을 어떻게 맞추느냐 이겁니다.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영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발전소에 가보면 미터기가 많이 있습니다. 미터기에 영점기준과 같은 것이 있어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가감의 조정을 해서 그 방향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양의 비준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영점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점기준은 어떤 자리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참선하는 사람들이 무아경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경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이 되면 반드시 자기의 수평선 기준이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76-125, 1975.2.2)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보면 마음의 문이 있습니다. 심문(心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문이 언제나 한 면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그 문도 이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 입장에서 관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심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면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 새벽 한 시에 기도하는 것과 세 시에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건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압니다. 신비스런 깊은 경지에 들어가서 기도해 보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느끼는 것과 낮에 느끼는 것과 저녁에 느끼는 것과 밤에 느끼는 것이 모두 다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 상태에서도 느끼는 그 기준이 우리가 육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느끼는 감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데도 어떤 시간에 잘 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감응의 도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잘 된다 하는 거기를 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문과 인간의 마음 문이 딱 맞아서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하는 길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마음을 닦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지만 사탄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전부 다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 가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아! 나는 선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마음 자체도 선하지 않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악한 마음권, 악한 사탄권에 감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한 권 내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차이로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마음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언제나 준비해야 됩니다. 언제나 수시로 찾아 맞추는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심도를 가려 가면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그러면서 하늘이 향하는 문과 어떻게 일치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76-127, 1975.2.2)

점점 이 상대적 입장에 서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겨울과 같은 기분만 느꼈는데 가을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가을과 같은 기분만이 아니라 여름과 같은 기분도 느껴지고 봄과 같은 기분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 우주는 돌고 있습니다. 마음도 돕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면서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일년을 두고 보면 춘하추동이지만, 일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춘하추동 계절적 형태가 하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봄에 해당하는 아침에도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도 봄과 같은 것을 느끼고, 여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겨울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큰 것은 큰 것을 중심삼고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작은 것도 상대적인 그 단위의 형태를 각자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계절을 따라서 자기가 봄이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겨울이다 하는 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많은 체험을 통해서, 많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아!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구나.`를 가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냐? 우리말에 암시(暗示)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새는 날아갔지만 퍼뜩 새가 날아가는 그 자체를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암시적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말하는데 무엇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76-129, 1975.2.2)

이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어떠한 형태가 벌어지느냐? 몽시(夢示)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꿈도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닙니다. 바울도 비몽사몽간에 3층천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걸 무심코 흘려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종합해 어떤 방향의 인연을 나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과학적인 면에서 데이터를 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 같은 것은 100퍼센트 적중하게 됩니다.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어떠한 사람이면 사람, 물건이면 물건이 인연되었는데 그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가 그 노래였다, 이런 사실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영적 차원에 있어서 마음 상태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음차(音叉:소리굽쇠)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76-131, 1975.2.2)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러느냐?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몸한테 끌려다니는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존재성을 확립해 또 다른 하나의 주체다 하는 그런 인격적인 차원의 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릅니다.

기도를 해서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명(共鳴)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 높은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로 발전해 나갑니다. 맨 첫 단계에서는 암시와 같은 사실들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는 이런 막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결국 그 자체는 뭐냐? 내가 언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 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고, 대상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누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괜히 그저 마음이 좋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걸 심파(心波)라고 합니다. 마음의 파장이 있습니다. 고기 장사하는 사람은 푸주 냄새가 나고, 천(옷감) 장사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냄새가 납니다. 그 마음의 냄새를 맡는 형태가 벌어집니다.

우리 몸에는 촉각 같은 것이 있어 전부 접선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전파 같은 것을 발사해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타락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계, 본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신에 대한 관계를 전부 절단해 버린 것이 타락입니다. 절단된 관계의 세계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자체가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 관계가 개척되지, 접속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갖지 않으면 개척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부 다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아, 오늘 좋은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이게 아닙니다. 그걸 찾아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야 됩니다. 그러므로 체휼과 실천이라는 것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이런 사실이 벌어집니다. (76-132, 1975.2.2)

그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계시(啓示)라든가 지시라든가 이런 것이 벌어집니다. 계시라는 것을 우리가 분석해야 됩니다. 지시라는 것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 주기도 하지만 환상으로도 보여 줍니다.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 쌍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소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런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밭을 계발하기 위한 하늘의 역사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마음의 밭이라는 것이 유리판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울뚝불뚝하다는 것입니다. 형은 수평 같은 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는 울뚝불뚝하다는 것입니다.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반사돼 나갑니다. 그러니 전부 다릅니다. 부분 부분을 계발하려니 그런 역사를 합니다.

계시의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示) 단계입니다.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까지 연결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활적인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안 가지고는 위대한 하늘 뜻의 결과 세계를 우리의 생활장, 생활무대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체휼적인 신앙이 고귀하기 때문에 계발해 나가야 됩니다. (76-133, 1975.2.2)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役事)를 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힘이 전기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체험을 해봤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이 우리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옵니다. 초자연적인, 초인적인 감정이 찾아들게 되면, 우리 몸이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반발하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신성과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되는 입장이 못 됩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플러스 마이너스와 같이, 음파도 강약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것과 같이 반드시 그 힘도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이러면서 개척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동이 벌어지고, 자기의 의식이 없어지고 영적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몸이, 육성(肉性)이라는 것이 타락성이 순화되어 자연히 100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현상이 없어도 역사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 과정을 거쳐 순화되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과정을 여러분이 거쳐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체휼 단계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마음이 명령합니다. 누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가끔 벌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체휼적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마음으로 느낀 것을, 체휼한 것으로 실험을 통한 체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체휼과 실천,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76-134, 1975.2.2)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개 우리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뭘 탐구해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지적이다, 영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그걸 생각하면 미신 같고,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그저 좋습니다.`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합니다. 대개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하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하는 환경에 백중하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 벼락을 한 번 맞고 나서 돌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폭발적인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은 종교적인 심령세계에서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76-136, 1975.2.2)

우리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크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뾰쪽해지면 시종여일(給終如一)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떨어집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작다면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평형을 만들어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세계의 중앙에 서야 되고,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76-136, 197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