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통해 실체를 깨닫는 신앙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07권 PDF전문보기

말씀을 통해 실체를 깨닫는 신앙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린양잔치는 무엇이뇨? 그것은 6천년 전에 하나님이 세워야 했던 참부모의 모습을 끝날에 다시 세워 가지고, 여기에 다시 한번 형제의 인연과 자녀의 인연을 갖추어 놓자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소망이요 우리를 이끌기 위해 6천년 동안 역사와 더불어 고생해 나오신 하나님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았을진대 우리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붙들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유대교단은 예수를 모실 수 있는 시대적인 헤택권내에 있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예수를 모시어 만왕의 왕으로 군림시킬 수 있는 시대적인 환경에 있었으되, 유대백성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유대교단도 예수를 배척하고, 택함받았다고 하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처하던 모든 사람들도 예수를 배반한 연고로, 예수님이 소망하시던 상대적인 기준은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끊어지니 유대나라의 역사도 끊어지고 유대나라에 내려오던 구약의 말씀도 다 끊어졌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울고 불고,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들의 한이요 슬픔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서러움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요? 이런 식으로 어떤 명사에 얽매어 사는 자신이 불쌍한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가 와야 합니다. 그날이 소망의 날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예수께서 실천하신 행동을 스스로 찾아내어 행하고, 말씀을 붙들고 예수의 모습이 이런 것이로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재발견해야 돼요. 예수의 모습, 십자가 상에서 원수들에게 못박혀 피 흘리는 처참한 자리에서도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그 모습, 그의 심중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찾아나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는가.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만으로 완결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망합니다.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말씀하기 위하여 애쓰시던 예수 그 자체와 애달피 말씀하시던 예수의 심정을 붙들고 그와 인연을 지어 세상 것을 청산한 후에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타락한 우리들은 참부모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의 참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씀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을 2천년 동안 연구했지만 모릅니다. 몰라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함과 하등의 관계를 갖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말씀의 목적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나온 기독교라면 이 기독교가 왜 오늘날처럼 되었겠는가.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목표와 말씀을 들은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끝날에는 성령을 붙들고 밤을 새워 기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끝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찾아오는 데는 어떻게 찾아올 것이뇨. 말씀을 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중에 실체를 갖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와 본연의 말씀이 주장하고 바라는 목표와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떨어져 있을수록, 그 거리만큼 예수님께서는 다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을 신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천적인 혁명의 힘이 나를 격동시키고 죽음의 골짜기도 늠름히 넘어가게 할 수 있는 내적인 충격의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행동적인 주체로 설 수 있느냐를 스스로 판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뇨. 이제는 그리워해야 됩니다. 2천년 동안이나 말씀을 그리워하였으니 이제는 말씀을 그리워는 동시에 그 말씀에 부합된 행동을 그리워해야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이렇게 갔으니 나는 이렇게 이렇게 가야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누구뇨. 우리의 참부모입니다, 참부모. 그분이 말씀을 하시고 친히 행동하셨으니 하신 그 행동을 그리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워하고 행동을 그리워하고 그 다음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부모 이상 그리워서 못견디겠다 해야 합니다. 밥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 모양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