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32권 PDF전문보기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오늘날 기독교면 기독교, 혹은 수많은 종교들이 왜 끝날에 와서 차츰차츰 망해 가느냐?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것은 전부다 자기가 복받기 위한 것입니다. 전부다 자기 하나님을 만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나라의 하나님이 되고 세계의 하나님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복귀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자신만을 위해 눈물짓지 않고 나라와 그 환경을 위해 눈물 흘릴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때에 자기도 모르게 서러움에 북받쳐 까닭없는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서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서러움은 자기의 서러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알고 보면 역사적 서러움입니다. 그 서러움은 누가 가져 오느냐? 하나님이 가져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서러움은 누구 때문이냐?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때문입니다.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서러움입니다. 그것은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세계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우리 자신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이로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회개를 하더라도 나라를 붙들고 회개하고 세계를 붙들고 회개해야 합니다. 저 민족은 뜻 앞에 섰지만 이 민족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 부락은 뜻 앞에 섰지만 이 부락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밤을 새워 가지고 그 부락이 정성들이던 이상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그 부락에서 받아 주지 않더라도 다른 부락을 말없이 점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이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예수님의 생활관은 어떠했느냐? 예수님은 밥을 먹을 때에도 그 밥상을 대하는 순간 그 밥상을 통하여 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세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효자 효녀가 되고 싶어하고, 충신 열녀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효자가 되고 싶다 해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옷이 형제들의 옷보다 못하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효자가 아닙니다. 내가 형제들보다 못하다고 부모에게 항의하는 효자가 있겠습니까?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그 나라의 비참한 운명보다도 더 비참한 자리에 간다고 해서 군왕을 배반하고 나라를 배반하는 그런 충신이 있습니까?

참다운 효자가 되려면 형제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흘리는 것 보다 형제를 위하는 마음으로 흘려야 됩니다. 부모 대신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염려끼쳐 드리는 형제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선다면 부모는 그를 효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가 먼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민족의 한계를 넘고 세계 인류의 소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소원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소원의 한계점까지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바라는 소원의 한계 점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 조상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나와 같은 개인이 생겨났고, 나와 같은 가정, 나와 같은 사회. 나와 같은 나라, 나와 같은 세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몽땅 부여안고 이세계 가운데 엉클어져 있는 모든 환경의 쇠사슬을 끊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쇠사슬, 나라에 대한 쇠사슬, 환경에 대한 쇠사슬, 사회에 대한 쇠사슬, 가정에 대한 쇠사슬, 나에 대한 쇠사슬을 끊어 놓아야 됩니다. 세계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가정입니다. 세계가 구원받으려면 먼저 가정이 구원받아야 됩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 구원받으려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안 다음에 '저는 구원 안 해주셔도 좋습니다. 세계를 구원해 주시옵고, 저희 나라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자기 민족을 위하여. 자기 나라를 위하여, 세계 만민을 위하여 흘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민족과 이 나라와 세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류를 대신 하여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통곡하면서 생애를 바치는 사람이 하나님편이겠어요. 남이야 어떻든간에 나라야 어떻든간에 내가 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편이겠어요? 전자가 참된 하나님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절대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