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한계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1권 PDF전문보기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한계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안 맞는 것 같아요? 내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거예요. 참이라는 것이 믿는다고 참이 되고 안 믿는다고 참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말한 것하고 기성교회에서 말한 것하고 어느 쪽이 참 같아요?「선생님 말씀요」 통일교회 교인들 입장에서 대답했다면 나는 그거 싫습니다. (웃음) 사탄에게 물어 봐도 문선생의 말이 맞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속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그 족속과 사돈 될 가망성이 있어요, 없어요?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이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만일에 그렇게 되었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 들어가 가지고, 그 사지에서도 자꾸 번성해 가지고 애급 나라가 불쌍해질 뻔했는데, 만약에 예수님의 직계의 아들딸을 남겨 놓았다면 잘 퍼졌겠어요, 안 퍼졌겠어요? 하나님이 잘 퍼지게 하겠어요, 안 퍼지게 하겠어요? 잘 퍼졌으면 나라가 이루어졌겠어요, 이루어지지 않았겠어요? 나라가 이루어졌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을 중심 삼은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일 수 있어요? 하나의 국가의 권위를 가지고 하늘 앞에…. 그렇게 되었으면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이 하나님의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속이 있었다면 우리도 친척이 될 수 있고 사돈도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돈이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사돈님 한다는 것입니다. 별수 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과 사돈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있다면 비록 타락한 인간이지만 타락한 세계의 아가씨를 보고, '저 아가씨가 아니면 난 죽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쓰면 예수님도 별수 없습니다, 결혼시켜 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는 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탕감과정을 거치는 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세계의 사람들이 예수님하고 친척을 맺을 수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하고 사돈을 맺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왕궁에 있는 훌륭한 패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이 다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나라가 예수님의 권내에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겠어요? 「들어갑니다」 다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기독교가 지금까지 몰리고 쫓기고 구름떼처럼 해 가지고 나라없는 신세가 되어 억울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구요.

그러면 예수님이 원해서 죽었어요, 몰려 가지고 죽었어요?「몰려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기도는 잘했어요, 못했어요? 기성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잘못한 기도라구요.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고 내 뜻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도 수작이 되는 거예요.

그 기도 내용을 보게 될 때, 그 기도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이것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입장에서 한 기도예요, 죽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는데 죽게 되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고 놀라서 한 기도예요? 놀라서 한 기도예요. 그러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래야 되겠습니까? 본래는 내가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면 모든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만민을 긍휼히 여기는 입장에서 후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그렇게 피를 흘리며 따라올 수많은 신도들, 그런 기독교의 비참함을 생각할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그런 기도를 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할수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놓쳐 버린다는 겁니다. 두 손에 떡을 쥐었다가 다 놓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손만이라도 떡을 쥐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영육 두 세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육적인 세계를 버리고 영적인 세계라도 구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인 천국을 모색해서 나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