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인 길을 간 아브라함·이삭·야곱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3권 PDF전문보기

역설적인 길을 간 아브라함·이삭·야곱

또, 아브라함을 보세요. 우상장사의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어머니, 아버지의 슬하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가지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데라의 집에서 떠나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고하고 내린 명령이 아닙니다. 불러 가지고 바로 내린 벼락명령인 것입니다. 청천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떠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아이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며 망설이면 안 돼요. 출발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그릇되게 되면 천추만대의 역사에 한이 될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탄의 참소조건이 되어 지나온 모든 역사가 부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나선 사람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즉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인데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친척 거느리고 형제자매와 같이 재미있게 살던 가정을 떨치고 야간 도망을 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또 형제자매가 알면 가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부모 형제자매들이 깊은 잠에 빠진 밤에 보따리를 싸들고 대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형제들아 잘 있거라. 나는 천명을 따라가는 길이니 내 앞에는 당연히 비참한 길이 있을 것이고, 연이어 수난길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필코 이 길을 가서 내가 뜻한 바를 이루고 돌아오겠으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남아 주십시오' 하며 엇갈리는 마음으로 식구들의 편안을 빌며 돌아서던 아브라함, 슬픔에 엇갈리는 심정을 가지고 고난길을 향하여 나서서 재작전을 하고 내일의 용사로서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섰던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겠느냐? 그것은 오늘날의 세상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행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 자체는 우상장사 데라, 즉 사탄의 소굴을 완전히 거부하는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이었고, 사망권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고향과 가정을 버리고 미련없이 떠난 그 자체가 사망권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사망권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놀음을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는 순간부터 국경을 넘어 이방의 나그네요, 유랑민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짚시의 선조가 될 수 있는 길을 나선 거예요. 그런 아브라함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애급에 들어가서는 바로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이 있기도 했고, 그랄왕에게 몰리는 처참한 환경에도 처했습니다. 그러한 수욕의 노정이 첩첩이 계속되는 입장에서도 아브라함은 서슴지 않고 아내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발이 틀림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틀림없는 길을 출발했기 때문에 틀림없는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념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백세에 만득자 이삭을 얻어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증거적인 실체를 보았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자식을 잡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건 전부 그 시대에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다 해도 한 사람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부가 부정적인 여건이요, 부정적인 행동이요, 부정적인 조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조건 앞에 아브라함은 '나는 당신 앞에 바쳐진 종의 몸인데, 주인된 당신을 거역하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하면서 절개와 지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도리인 것을 알고 수난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로를 거쳐 1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야곱을 중심삼고 복귀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아 때에 실수한 것을 재차 수습함으로 말미암아 복귀역사를 되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전부 부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야곱도 보십시오. 자기 형님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에 가서 종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종살이를 했어요. 그 시대의 부정적인 환경에 몰림을 당하고, 환경에 에워싸였지만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원수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포로와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미래의 이스라엘 천국을 꿈꾸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귀세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한 생활을 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그 시대에 환영받아 가지고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전통을 씻어 버리고 미래의 전통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런 수난의 길, 수욕의 길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의 선조의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거쳐 선조의 자리에 선 것이 우리의 조상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