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보다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4권 PDF전문보기

선조들보다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나님은 지금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는 동안 역사 과정에서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희생의 대가를 치른 그 범위는 한 부분에 제한된 범위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를 넘고 세계를 긍하여 이런 환경을 움직여 나오면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만 두고 보더라도, 아담 가정으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가정, 사가랴 가정, 요셉 가정까지 4천년의 역사시대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막대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오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희생의 인연을 계대해 나오기 위해서는 역사시대의 선조들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 더 큰희생의 대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지고는 발전을 못 하고, 미래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필코 더 크게 희생하기를 결의하는 무리가 없어 가지고는 이 세계를 발전하는 섭리로 추진시켜 나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과거보 다도 희생의 대가를 더 추구하고자 하는, 더 희생하고자 하는 무리를 찾아서 이 전쟁터를 개척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되는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120년 동안 싸워 나왔습니다. 120년이라는 기간을 생각할 때, 그것은 12일도 아니고 12년도 아닙니다. 120년이라는 기나긴 기간은 전체 생애에 해당하는 귀중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120년은 살다 남은 그런 기간이 아닙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는 일생에서 가장 귀한 생의 토막을 갖추어 드릴 수 있는 기간이 아니겠느냐는것입니다.

그 기간에 수난길을 감수하며 120년을 하루같이 꾸준히 싸워 나온 노아 할아버지의 인내력과 성실성.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충실함은 그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 배후에시 얼마 만한 수고와 희생의 대가를 치렀겠습니까?

가정에서의 핍박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의 반발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친척들이 그를 부정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극복함에 있어서 그에게 하루는 기쁨의 날이 아니라 도리어 슬픔의 날이 이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하루가 슬픔의 날인 동시에 그하루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매일 가중된 투쟁과 가중된 시련 가운데서 참는 시련도 컸을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런 시련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중된 환경의 시련이 노아 할아버지 일신 앞에 부딪쳐 왔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노아 할아버지야말로 역사상에 있어서 섭리의 뜻을 대해 나가는 하늘편 사람 중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볼 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정든 고향 산천을 떠나갈 때 광포(狂暴)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날 아무시에 어떠한 사명을 짊어지고 어떠한 곳으로 간다고 이웃, 친척에게 선포 하고 간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밤에 홀로 몸을 감추어 길을 떠나는 외로운 신세였던 것입니다. 그 고독한 일면은 아브라함 일신의 일면만이 아니요 그 외로운 자리는 하나님의 외로운 자리와 일치될 수 있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런 기원을 갖지 않고 출발하였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로운 자리가 하나님이 처해 있는 외로운 자리요, 그 심각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처해 있는 심각한 자리였습니다. 악을 분립시키고, 악을 제거시키고, 악을 단호히 처단할 수 있는 결의의 심정과 일치될 수 있는 태도와 행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천년의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중심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음을, 그런 내연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애급의 궁중에 들어가 바로의 딸,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사랑받는 자리에 선,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처해 있는 자리는 호화스러운 자리였지만 그는 마음으로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이 자기 소원의 터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 갖추어진 환경이 호화스러우면 호화스러울수록 그것은 그에게 자기가 찾고 있는 기쁨의 환경이 아니요, 기쁨의 자극이 되는 환경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민족애를 촉구시킬 수 있는, 그런 자극을 받는 환경으로 삼았고, 자기 민족의 자주성을 고취시키고, 애국적 심정에 불타 오를 수 있는 하나의 터전으로 삼았던 모세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 사람이 싸우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애급 사람을 쳐죽였다는 사실은 돌변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어 평화스러운 국민으로서 자주적인 국민으로서 살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애급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호화로움과 영광의 터전이 크고 넓으면 넓을수록, 또 거기에 있는 가치의 내용이 가중 하면 가중할수록 그 이면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제거시킬 수 있는 애국적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 민족애의 한 발현으로 나타난 자리가 애급 사람을 쳐죽인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애급 사람을 쳐죽이는 그 자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리였느 냐?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이 수백년 동안 애급 민족 앞에 고역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당장 그들을 쳐죽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그런 사람이 나타나 주길 바라시던 숨어 있던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해서 모세가 애국적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로 나타나 그런 심정적 출발을 가졌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적인 민족의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대에는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교법사나 제사장들도 메시 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혹은 생애를 투입해 가지고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린 많은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이 바라시 소원 앞에, 당신이 보내시는 그 아들이 오는 길 앞에 가까울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인, 혹은 교법사들은 영광 가운데 주님이 오시기를 바랐지만 영광 가운데 올 수 있는 아들의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라고 있는 그 무리들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과는 천양지판이었습니다. 판이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올 수있는 길은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반대로 비참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비참한길을 개척하는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무리 들을 찾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날 그 당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섭리를 대하는 관(觀)과 세례 요한이 뜻을 대하는 관(觀)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꽃을 본다고 해도 외로운 가운데 사연을 통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광야의 처량한 그 환경이 야말로 깊은 내면의 심정을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있는 자극적인 그런 황량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황량한 환경에서 고독이 사무쳐 들어오고 어려움이 부딪쳐 올 때, 그 고독과 어려움을 자기 일신의 고독과 어려움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독과 하나님의 어려움을 동정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고독한 자리에서 어려움을 물리치며 그 환경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때, 그날이 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선봉자의 길을 가는 세례 요한의 입장은 심각한 입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어떠한 선지자, 어떠한 교법사보다도 하나님이 찾아오는 그 길, 그 도상에 가까운 인연을 갖출 수 있는 시대적인 대표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 간곡히 바라는 소원의 마음은 자기 일신의 행복을 해결짓기 위해서 메시아로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메시아로 모실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민족과 역사시대, 혹은 하나님의 섭리시대에 있어서 자랑이 되고 전통적 내적 인연을 세울 수 있는 대표자임에 틀림없 었기 때문에, 이런 세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적인 섭리의 뜻을 연결시켜 나가려고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