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천년 역사를 재탕감하는 비운의 노정을 걸어온 통일교회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6권 PDF전문보기

6천년 역사를 재탕감하는 비운의 노정을 걸어온 통일교회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을 두고 볼 때, 여러분이 역사적 부활체와 같은 승리적 자리에 서 있다면…. 지금까지 6천년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아담이 타락한 이후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섭리가 출발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뜻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노아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120년 기간을 통해 이루려 했으나 거기서 또한 가정적 일치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섭리의 뜻은 다시 연장되었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창건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데라의 가정에서 불러내는 섭리의 출발과 더불어 3대를 거쳐 가지고,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갖은 수난과 고역을 거쳐서, 일대의 뜻을 종결지었던 야곱의 21년노정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터전 위에서 비로소 하나의 가정적 형태의 기반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선민적인 가정의 형태를 갖춘 야곱 가정을 하나님은 시대를 거쳐오면서 발전시켜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창건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 나온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4백년간의 애급고역을 거쳐서 이스라엘 나라를 복귀해 가는 노정에는 주위의 수많은 국가 앞에 존경을 받기도 했고, 뜻 앞에 그들이 서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새롭게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민족을 선민국가로서 부활시키기 위해 사탄세계에 내주어서 시련을 거듭 받게 하는 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시련의 역사를 거쳐오다가 예수님 시대에 와서 하나의 승리적 터전을 종결짓기 위한 사명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승리의 터전에서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수난의 역사는 다시 연장되었습니다. 즉, 기독교라는 서러운 영적 터전을 계승해 가지고 다시 수천년 역사를 거치게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가 영육(靈肉)을 중심삼고 지상에 하나의 국가적 터전을 갖지 못하고, 그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통일된 사상에 의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영적 이스라엘권을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며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역사는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소모해 왔으며, 막대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 전체의 희생의 대가를 다시 한 번 실체적으로 탕감하기 위한 가치적 내용이 요구되기 때문에, 재림사상을 중심삼은 새로운 섭리의 뜻이 오늘의 통일교단을 중심삼고 출발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적인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섭리를 대표했던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의 기독교를 회고해 보면, 그 민족이 소원했던 뜻을 이룬 때가 없습니다. 그 소원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적인 뜻임과 동시에 선민을 중심삼은 어떤 한계내의 뜻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민적 기반을 토대로 해 가지고 어느 한때에 세계적 터전 위에 완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시는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그런 섭리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가 기독교와 한국 국가를 중심삼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에 기독교가 반대하고 한국 정부가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6천년 역사를 재탕감하는 비운의 역사의 고빗길을 다시 걸어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6천년 역사과정에서 실패했던 그 전체의 양상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이나 어느누구에게 재현시켜 가지고 탕감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어느 특정한 책임을 진 개인, 중심적 사명을 담당한 그분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분이 역사적 주류 사상권내에 있어서 승리의 기점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것도 사실이고, 전체를 탕감한 내적 승리기반을 결정지어야 할 사명을 짊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적인 중심을 결정하기 위한 사명이지, 전체의 횡적 기반을 연결시켜 가지고 전체의 사명을 해결지을 수 있는 입장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적인 이 전통적 승리의 터전을 세워 가지고 그것을 횡적으로 이어받게 하여 종족적인 환경을 거쳐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 무대까지 확대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체 섭리의 뜻을 종결지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섭리관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오늘 통일교회가 짊어진 사명은 선생님이면 선생님 개인을 중심삼은 사명만이 아닙니다. 선생님에게는 물론 전체를 대표해서 종적인 핵심을 결정지어 승리의 터전을 닦아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이것은 혼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개인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어야 되고, 민족이 있어야 되고, 국가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중심삼아 가지고 출발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예수님 때에는 사가랴 가정과 요셉 가정이 있어 가지고 종족적 가인형과 아벨형의 협조의 터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터전을 기반으로 하여서 이스라엘 교단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이 준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입장을 갖추지 못한 예수는 필시 비운의 운명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도 역시 기독교를 중심삼고 하늘을 위하여 정성들인 한 개인과 한 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거기에서 가인적인 가정과 아벨적인 가정이 하나될 수 있는 가정의 기원을 모색하고 나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적 터전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재탕감의 노정을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본다면, 우리의 20여년이란 세월은 기독교로부터 몰려났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몰려났던 비운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 와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기독교와 상봉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점에 왔고, 대한민국을 대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점에 온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와 다른 것이 뭐냐? 과거에는 우리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이제는 반대하지 않고, 우리와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시대권내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경지에 처해 있는 우리 통일교회의 입장을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의 개교회를 책임진 여러분은 중차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한 교회를 두고 볼 때, 어떤 교회가 한 부락을 단위로 해서 서 있다면 그 교회는 그 부락만을 대표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가 한 군(郡)이면 그 군을 반드시 탕감하고야 도(道)를 탕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도를 탕감하고야 국가를 탕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감노정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군을 중심삼고 거기에 우리 교회가 있다면, 그 군을 대표한 교회장은 그 군 전체의 생명과 재산을 하늘편으로 끌어 넘기느냐, 혹은 사탄편으로 끌려가게 하느냐를 결정지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교회장은 전체의 뜻을 중심삼고 볼 때는 하나의 군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체를 두고 본다면 어떤 입장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