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아벨로서 해야 할 책임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6권 PDF전문보기

여러분이 아벨로서 해야 할 책임

그러면 종족적 가인을 굴복시키지 못한 터전 위에서 민족적 가인을 굴복 시키는 일이 가능하냐? 안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방에 있는 여러분은 책임지고 있는 군(郡)이면 군을 중심삼고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중앙을 중심으로 하는 도(道)가 되고, 도를 중심으로 하는 군입니다. 그러므로 군이 최일선입니다. 군은 횡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제일의 터전입니다. 이 터전에서 가인 아벨의 승리적 터전을 가려내지 못하게 되면 우리의 섭리적 터전은 어떻게 되느냐? 크나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방을 책임지고 있을 때, 선생님은 교단을 중심으로 기성교단과 수많은 종교계와 이 민족과 관계맺을 수 있는 내적 기반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1970년도부터 지금까지 준비해 나왔습니다. 원래는 1968년부터, 제2차 7년노정을 출발하면서 초교파 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지금까지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가지고 이만큼 끌고 나왔습니다.

자, 이런 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이 뭐가 돼야 하느냐, 전도하는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느냐? 까놓고 얘기하면 가인 아벨의 자리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전도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역사적인 노정을 탕감시키기 위한 정성을 들여 가지고 하나님의 협조를 받는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하늘과 아벨이 하나 안 돼 가지고는 책임을 완수 못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아벨대로 책임할 수 없는 거라구요. 다시 말하면, 아담 혼자 책임을 다했다고 해서 복귀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벨은 아담의 입장을 대신해야 하는데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벨이라고 하며 출발한다고 해서 아벨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인을 복귀하기 위해서 나섰다고 스스로 적당히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 결정돼야 됩니다.

그러면 아벨은 어떤 사람이냐? 하늘과 먼저 하나된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된 그 기준은 어떤 것이냐? 아벨은 하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먼저 죽을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선생님이 아벨이면 여러분은 가인이기 때문에 선생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냐? 아담 가정에 있어서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그 한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아벨인 선생님이 죽을 수 있는 운명에 있을 때 여러분이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되지 않고는 탕감복귀가 안 됩니다.

열두 사도는 왜 비참하게 죽었느냐?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기름 가마에 튀겨 죽고, 톱으로 켜 죽는 등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느냐? 그렇게라도 죽지 않으면 죽은 후에 면목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희생하고, 더 밟히고. 더 비참한 길을 가야만 가인형의 기준을 완결 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지 예수님보다 덜 고생해 가지고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요, 희생의 종교입니다. 응당 죽어야 될 것을 알고 죽어야 돼요. 자기가 맞고 복귀해 돌아가는 길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이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믿음의 아들딸 중심삼고 새로운 이스라엘 편성을 해 나가야 됩니다. 선생님이 열두 가정을 중심삼아 36가정 72가정 120가정을 찾아 놓은 것같이 그 길을 그대로 밟아 가야 되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그냥 이 놀음 한 것이 아니라구요. 예수가 그것을 해결짓기 위해서 운명을 가려 가면서 비운의 죽음길까지도 가게 됐고, 하나님도 그런 문제를 해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6천년동안 역사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선생님이 가는 길은 그 분야가 여러분보다 한 단계 앞서서 더 넓은 국가적이요, 세계적일 뿐이지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선생님이나 여러분이나 밥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라고요. 호흡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요. 이와 같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같은 공식노정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 자신을 두고 보게 되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선생님의 입장은 예수님이 씨족과 종족 앞에서 쫓겨나 가지고 외부에 나가서 씨족을 복귀해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지금까지 일생은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기독교의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종족적 메시아의 터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와야 되겠기에 거리에서 난데없이 만난 행인과 마찬가지의 입장인 여러분을 선생님의 혈족보다도 부모 처자보다도 더 사랑해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아들딸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해서 희생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친 아들딸 기르는 것보다 3배 이상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한 사람의 아담이 완성되는 데는 1차 구약시대, 2차 신약시대, 3차 성약시대, 이렇게 3시대의 아들을 거쳤기 때문에, 이 세 아들의 가치와 같은 수고를 거치지 않고는 복귀완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3단계의 사망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사망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기의 아들딸, 혈육을 위해서 겪는 수난보다도 3배 이상의 수난의 길을 거치지 않고서는 자기와 생명을 같이할 수 있는 믿음의 아들딸을 못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