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도 받지도 못한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0권 PDF전문보기

사랑하지도 받지도 못한 예수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 십자가의 길을 가는 도상에 서게 될 때, 예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를 저버렸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예수가 죽어가는 길을 가게 될 때 죽기를 다짐할 수 있는 참다운 제자가 있었더냐? 예수와 더불어 죽기를 맹세했던 베드로, 모든 제자들이 전부 다 선생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죽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예수가 과연 천정의 일념을 다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수제자 베드로 이하 열두 제자들을 사랑할수 있었겠느냐? 그런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정으로부터 인연 되어 있는 참아들로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인간을 진정히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저버린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함인 동시에 사랑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려니 사랑할 사람이 없고, 사랑을 받으려니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입장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의 고독한 심정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 그 누구도 몰랐더라 이거예요. 그 누구도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을 거쳐 죽음의 자리에 임할 그때까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그 마음속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땅 위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들, 예수를 위해서 애절한 심정을 가지고 당신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이 있었던들. 죽음의 십자가의 길은 그렇게 고독한 길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고독이 극한 자리에서, 좌우의 강도들과 같이 죽음의 길을 가는 도상에 있어서 오른편 강도가 위로하는 몇 마디를 중심삼아 가지고 위로받고 '너는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가리라'고 말씀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고독한 자리에서 이 땅 위에 인간을 찾아왔다가 떠나가야 할 입장에 선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인정의 일면을 남기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으로서는 오른편 강도에게라도 그러한 심정적인 내연을 남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시 인간세계를 찾아와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오른편 강도를 중심삼고 동정하는 자리에 섰던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하냐? 아무 인연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강도,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 오른편 강도를 대해서 동정의 마음을 남기고 가려 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두고 볼 때, 얼마나 비참했던고?

예수님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4천년 동안 수고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던 것은 오른편 강도 하나 만나게 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 선열들을 보내 죽음길을 가려 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고이 품어 키운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세운 것은, 유대교를 만드신 것은 유대교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남아짐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남아지는 것이요, 예수님이 남아짐으로 말미암아 그 교단이 남게끔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것이지, 예수님 이외에 남아질 수 있는 교단이나 나라를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는 반기를 들고, 그 교단은 죽음길로 내모는 입장에서, 혹은 자기 부모마저 가는 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제자마저도 배척하는 심각한 죽음길에서 동정의 한마디를 남길 수 있었던 사람이 누구냐? 오른편 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오른편 강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던 것이냐?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심중의 사랑을 대표한 예수는, 그 나라 전체를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어하던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가 바라던 사랑의 심정이 아니었겠느냐.

자기가 받던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지금까지 수난길을 가려 나오면서 참고 남아진 무리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의 소원이 아니었겠느냐. 요셉의 일족과 사가랴 일족, 자기의 친척 전부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아들로서의 권위를 대신하고, 또 같은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서서 그 일족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의 마음이 아니었겠느냐. 더 나아가서는 자기 부모는 물론이요, 자기 사랑하는 형제들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내 형제라고 내 부모라고 붙안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의 심정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볼 때, 언제 어느때 예수가 그러한 사랑을 해봤느냐? 사랑을 못 해봤다는 거예요. 사랑을 못 해본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죽음길을 예수 앞에 맞게 하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서 3일 후에 부활해 가지고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간 예수에게는 그 길이 기쁜 길이 아니었습니다. 죽기 전에, 생전에 이 땅 위에서 심정적 인연을 맺어야 했는데, 그 누구도 하나님이 준비한 자리에서 맺지 못하고, 이 터전을 다 쓸어 버리고 난 이후에 맺었는데, 그때가 부활 직후가 아니었더냐.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자마자 사랑할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부활한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주님인 것을 알고 반가와 예수를 붙들려 할 때, 그리 말라고 거부한 것을 우리가 알지 않느냐. 그건 왜 그랬느냐 이거예요. 사랑하는 데는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하고 나서, 친척을 사랑하고 나서, 교회를 사랑하고 나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서 세계를 사랑해야 될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데는 질서가 있을 것이 아니냐.

부활한 자리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와야 할 것은 예수 앞에 지극히 가까와야 할 예수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가 돼야 되고, 제자가 돼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앞에 나타난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 후 40일간 배반하였던 제자들을 다시 수습하는 자리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떠날 날이 가까와 오자 예수는 베드로를 대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게 될 때,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하고 막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첫번에는 얼굴을 들고 반겨 대답했지만, 다시 예수님이 심각한 자리에서 쏘아보며 두 번 묻게 될 때에 베드로의 마음에 자신이 있었느냐? 문제라구요.

여기에서 당당한 자신을 갖고 '그 무엇이 맞부딪쳐 오더라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천지가 요동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꺾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가 대답한 자리였느냐? 엇갈린 입장에 서 가지고 왜 이렇게 물을까 하는 반면에, 며칠 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던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직각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자리가 아니었더냐. 세번째 물음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을 때는 틀림없이 얼굴을 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겠어요? 세 번씩이나 배반했던 녀석이 그렇게 묻는 장본인 앞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지 않소. 그 무엇이 반대하더라도 다부숴 버리고, 다 제거시켜 버리고 이것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고 도리어 스승에 대해서 반문할 수 있는 그런 자신 있는 자리냐? 두 번 묻고 세번 묻게 될 때, 머리를 점점 숙일 수 밖에 없는 베드로가 아니었더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이 땅 위에 왔던 예수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말 속에는 지극히 고독했던 예수님의 생애를 종결짓기 위한 최후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입장에서 와 가지고 그 사랑을 인간 대해서 몽땅 부어 놓고 가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의 그 누구를 사랑했단 말이냐. 사랑했다는 자리가 오히려 사랑하느냐고 묻는 자리가 되었더라 이거예요. 이 얼마나 비참한 자리냐 이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안다'고 그렇게 칭찬하는 말로 부활 이후 찬양할 수 있는 사도를 못 가진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다 이거예요.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를 못 가진 예수, 제자마저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