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1권 PDF전문보기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힘

세상에 타락된 인간 끼리끼리의 사이에도, 부자지간에 서로 갈라졌다가 어떠한 연유로 인해 가지고 장년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영화 같은 데에서 봤을 거라구요. 그 아버지가 아들을 찾기 위해 고통을 극복하면서 수고하는 것이 부모된 도리가 아닙니까? 자식은 모르기 때문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부모가 수십 년이 넘어 50세가 된 아들을 만났다 하게 되면, 부모가 그 아들을 만남과 동시에 '야, 야, 이 녀석아, 50세가 되도록 내 생각도 한 번 안 했어? 이래요? '야, 너하고 나하고 어디 한번 역사를 말해 보자' 이래요? 어때요? 역사는 다 집어치우는 거라구요. 역사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뭐냐? 심정입니다. 자기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심정입니다. 아버지인 줄 알게 되면 과거야 어쨌든, 체면불구하고 자식은 '아버지' 하는 거예요. 면목이야 있겠으면 있고 말겠으면 말고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야 아무개야!' 하며 벼락같이 부둥켜안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야, 야, 야, 조금 스톱, 생각해 보자' 이러겠어요? '야, 너 아무개 녀석아, 어릴 때에 고생한 것을 좀 알고 만나자' 그래요? '내가 너를 찾아 만나기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렸기 때문에 너도 한번 흘려 보고 만나자' 그래요? 그런 것은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일화시키고 귀일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요, 사연이 아니요, 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뿐입니다. 이 힘만이 역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 거예요.

인간이 금력을 가지고 인력을 가지고 다 해봐도 도달해야 할 곳에 아직도 미급입니다. 처절한 절망의 벽에 부딪친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너하고 나하고 말해 보자' 하는 사연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자, 토론해 보자. 자, 사연을 이야기해 보자. 진리니 무엇이니 그런 놀이를 해보자'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안 돼요. 점프를 해야 됩니다. 대들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그는 틀림없이 내 아버지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게 문제라구요. 여기서부터 비로소 신(神)과 인간의 인연이 지상의 기대에서 재출발할 수 있지, 그 외에는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진정히 알았다면, 이제 '이러한 예를 살피고 아버지를 대하기 위해 찾아온 나 자신이 이제 당신을 알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망하지 않는 것이요, 그 사람 또한 망하지 않는 것이요, 그 사람이 사는 세계는 또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아요? 물론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어제 청평수련소에 있었는데, 홍수가 나서 한강에 물이 만수가 되어 흘러가는 거예요. 오늘 여기에 안 오면 안 되겠는데, 어물어물하다간 못 오겠더라구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물을 헤치고 왔어요. 그것은 모험이라구요. 오면서 보니까 뭐 집이 안 떠내려오나, 뭐 무슨 살림살이, 가구, 뭐 별의별 오만 가지가 다 떠내려오는 거예요.

그 떠내려오는 것들을 볼 때, 저것들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전부 다 보긴 봐도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구요. '넌 어디 있던 거니?' 하고 물어 볼 수도 없고…. 그 물건들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저 흘러 떠내려가는 것으로 보지만, 그 자체들의 가치는 천태만상이라구요. 알겠어요? 돼지 새끼가 떠내려가더라도 그 돼지 새끼도 주인에 따라 가지고 가치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아무개집 돼지를 동네의 종이 발길로 찼다가는 돼지를 찬 발길이 그 주인한테 채입니다. 그럴 수 있지요? 아무개집 가정지물, 즉 바가지 하나라도 발길로 찼다가는 그 주인한테 혼나는 거예요. 그 가정지물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은 주인을 천대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인도 그가 자기 휘하에 있으면 '야 이 녀석아' 하며 거꾸로 처박을 것입니다. 이렇듯 그 가치의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

모양이 같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도 천하에 없는, 하나님이 기억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겠어요? 여기에서 한국 역사가 기억할 수 있는 위문품이 떠내려올지 모릅니다. 그것은 꼭 무슨 큰 집채가 아니고 이러한 손수건, 종이 짜박지 한 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가치는 엮어져 온 배후의 역사에 따라서 천태만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인류역사 앞에, 인류심정역사 앞에 가치적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날 인류는 그런 역사의 홍수에 떠내려가는 오만 가지의 물건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만일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 가치를 아는 주인이 있다면 어떤 것을 건질 것이냐? 종이 짜박지 한 장 줍는 것을 남들이 보게 되면 '저 미친 녀석 보라고, 저 미친 녀석, 건지려면 제일 큰 토막나무 같은 것을 건지지, 저게 무슨 미친 짓이야. 저렇게 수고해 가지고 아이구 종이 짜박지 한장을 건지니, 에이 이 녀석아' 그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종이 짜박지 한 장이 나라를 팔고 살 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역사를 해방할 수 있는 문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럴 때에는 누가 지혜로와요? 그것은 아는 사람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역사도 그와 마찬가지요, 이 세상 인간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