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상에서도 충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4권 PDF전문보기

십자가상에서도 충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예수

그러면 아들을 그렇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딱한 사정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 그것은 성경에 없습니다만, 아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딱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기독교의 예수를 믿겠다고 그렇게 아둥바둥 모이는 것도 비참하고 말이예요, 모든 선민의 편이 돼야 할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고, 모가지가 떨걱떨걱 떨어지지 않나, 기름에 튀겨 죽지 않나, 태워 죽지 않나…. 이러한 운명에 부딪치는 것을 보고 '아이구, 하나님은 막을 수 있지 않소?' 하겠지만 전지전능하면서도 그것을 참아야 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한이 맺히겠어요? 그거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가지고 하나님이 최고로 높으냐 이거예요. 언젠가 한번 깨끗이 청산해 버리면 좋겠다구요.

로마에 가면, 로마제국 박해시대 4백년 동안 사용하던 카타콤바, 지하굴이 있는데, 그것이 4백 킬로미터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야! 종교가 굉장히 무섭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만일에 삼천만 민중이 그런 신앙으로 불타 있다면 여기서부터 평양에 있는 김일성의 안방까지 직행 통로를 뚫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못 하겠어요? 안방으로 전부 다 해 가지고 스위치만 한번 누르면 '꽝!꽝!' 해버릴 수도 있다구요. 20년 동안에 무슨 짓을 못 하겠어요? 그렇게 다 죽여 버린다는 것이 안됐지만 말예요. 극단적인 말을 한다면 못 할 것이 없더라 이겁니다. 그렇게 피해 가면서 거기서 모인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거기서 죽게 되면 전부 다 거기에 묻다 보니 나중에는 묻을 데가 있어요. 전부 다 죽은 시체를 모아 놓은 성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명당이라구요. 이래 가지고 시체가 썩어서 물이 나오고 그런 데서 살았다구요. 그런 시대를 거쳐 나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환경 가운데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나왔던 정신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그들은 원수지간인 로마제국을 원수시해 가지고 이들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도, 하늘 앞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망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그곳이 되기를 더 간절히 바랐을 것이 아니냐.

그리하여 로마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을 위해서 충신이 되라면 문제없이 충신이 될 것이 아니냐. 그렇겠지요? 그러나 기독교가 동굴 아래로 몰려다니는 시대로부터 4백년 동안 천대를 받았지만, 결국은 로마가 먹혀 버렸다구요. 그렇지요? 악이 선을 치고는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다간 한정이 없겠다구요.

자, 예수님이야말로 역사이래의 비참과 절망의 첨단에 선 운명길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붙들고 넘어간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가 죽는 자리에 나가는 딱한 사정보다도 당신의 심정 가운데에는 저를 죽여야만 하는 더 비참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미처 몰랐소? 이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아량을 가졌다는 거라구요.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게 되었을 때, '아이고 아야!' 했더라면 어땠을 것이냐? 뼛골에 스며드는 아픔이 아무리 절망을 촉구하더라도 참아라! 생명이 다 하더라도 참아라! 그것을 바라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가슴은 그 이상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도리어 아버지를 눈물을 흘리는 자리, 피 흘리는 곤경의 자리에 떨어져 가지고 자기 몸이 시들어 가는 입장에 서더라도 당신을 다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품고 간 효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살아서 남과 같이 당신의 영광의 존전에 효자의 칭호를 가지고 아들딸을 거느려 가지고, 씨족을 거느려 가지고, 민족을 거느려 가지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한을 세계적으로 대신 짊어지겠다는 효자의 권위를 갖고 나타나지 못한 한을 품고 간 예수님, 그 묵묵한 예수의 사상과 신념에 동행한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그것을 보는 자리는 하나님도 눈물 짓지 않을 수 없고 가슴이 찢어지고 그 몸이 말라가는 그런 고통을 극복하기에 궁했을 그런 자리가 아니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부르는 예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님의 심정을 뚫고 나가는 화살 이상의 예리한 말씀으로 아버지의 가슴을 찔렀을 것이 아니냐. 최후에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말을 할 때,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니었느냐.

'저는 이렇게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아픈 심정을 염려 하면서 이렇게 가는데 당신은 거기에 한마디의 회답이라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마음…. '내가 이렇게 가는 걸 알아줄 줄 알았는데 하늘은 무심도 하시다!' 이런 마음. 알아주는 흔적조차 없는 것 같은 입장에 서게 될 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그 이면에는 '사랑의 마음을 다해 가지고 당신 앞에 효도를 다하려고 했습니다' 하는 마음이…. 이러고 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구요? 무엇을 다 이루었다구?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어서 불효의 채찍을 남길 수 있는 한 순간이요, 하늘 앞에 6천년 생명의 원한이 조건을 남길 수 있는 무서운 자리를 넘어가는 그 심정, 불효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각오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 찰나마다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고, 하늘을 반박할 수 있는 순간이 일신에 사무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렵게 생각했던 예수가 아니었겠느냐.

그러한 싸움 가운데서도 지지 않고 하늘만을 위하여 충의 도리와 효자의 도리를 심고 가는 여기에서 생명이 다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자기 소신의 목적을 끝까지 관철한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은 맞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뜻, 뜻….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불효의 자리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서 뒤넘이친 예수의 그 마음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세계의 공포가 휘몰아쳐 왔고, 자기 일생 일대의 모든 것이 하향선으로 엇갈리는 그런 순간 아찔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개인의 사정도 생각했을 것이고, 어머니 아버지도 생각했을 것이고, 종족도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 올 나라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라를 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 하나가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남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내적으로 다짐하며 스스로를 제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 마음을 어기지 않는 입장에서 자기 스스로를 이기고,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자리가 불충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과 하늘도 불충이 되지 않기를 바라던 마음이 안팎으로 들어맞아야 되는 거라구요.

예수님이 그런 자리에서 갔기 때문에 그의 무덤에는 부활의 서광이 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겁니다. 이래 가지고 죽은 예수로 말미암아 전세계가 전부 다 뒤넘이치게 된 거예요. 그렇잖아요? 산 예수가 아니라구요.

그런 역사를 거쳐 가지고, 기독교는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리며 로마 박해 4백년 기간을 거쳐 가지고 피의 종교로 출발한 것입니다. 죽음 길로 개척한 길이니 그 길을 따라가는 후손도 죽음길을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살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대로 정도의 길을 밟아 가지고 세계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라는 교회는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심정적인 내연에 있어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중심삼아 가지고 창조 전 하나님 시대서부터 시작된 거라구요. 창세 전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인연이 돼 가지고 창조하던 하나님, 창조 이후의 하나님, 타락의 정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 그리고 타락한 이후에 복귀의 문제를 놓고 슬픈 탄식권에서 싸워 나온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의 시대를 거쳐 가지고 그런 것을 다 청산지어 놓고 해방권 하나님의 세계까지 가자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이어받은, 전통적인 인연을 계승한 역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