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받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의 목적이 일치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3권 PDF전문보기

축하받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의 목적이 일치해야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실 때의 소원과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가 이 땅 위에 왔던 소원과 목적이 무엇이냐?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로서, 신앙하는 자로서 예수를 구주로, 신앙의 중심된 분으로 모시는 우리의 소원과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이 달라지고, 예수의 소원과 목적이 달라지고, 믿는 성도들의 소원과 목적이 달라지면, 여기에서는 완전한 뜻의 완성이란 것을 볼 수 없고, 뜻의 귀일점이란 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 위에 보내시고 바라보는 그 앞에 태어난 메시아를 놓고 볼 때, 이 땅 위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는 만민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그 자리에 참석하여 축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의 소원, 하나님의 목적과 예수의 목적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 목적은 단지 축하하고 거기에서 남아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축하와 더불어 내 생활과 내 생애의 목적과 연결되어 들어가는 결정적인 조건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축하하러 왔다 갔던 동방박사에게도 원래 축하하게 한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목적에, 섭리의 목적에 일치될 수 있는 인간적인 대표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그걸 요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동방박사를 예수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또, 목자를 보내 축하하게 하고 그 외에 안나 등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축하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의 소원이 인류의 소원과 일치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런데 예수의 소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알지 못하고, 예수가 오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축하하고는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축하하고는 가 버렸으니 지금까지 역사도상에 있어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 가운데 하늘이 보시는 견지에서, 만민을 대표하는 견지에서 예수의 탄생을 진정으로 축하한 사람이 있었느냐 할 때에, 지금까지 진정으로 축하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 또 목자, 안나, 그외 여러 사람들이 메시아가 탄생한 것을 증거하고는 전부 다 가 버렸다는 거예요.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증거한 것과 나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지 않은 입장에 서 가지고는 메시아로서 행사할 수 있는 터전이 세워질 수 없다는 겁니다. 축하하고 가면 가는 것으로 끝나지, 거기에는 구원을 받을 자와 구할 자와의 인연을 세울 수 없어요.

구함을 받되 일시적인 시간권 내의 구함을 받게 하는 구주가 아니예요. 온 생활을 통할 수 있는 구주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 구주는 내 개인의 구주가 아니라 과거를 대신할 수 있는 구주가 되어야 되고, 나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시대 전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구주가 되어야 되고, 앞으로 올 후손의 구주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주를 축하하는 데 있어서는 내적인 간곡한 소원과 간곡한 목적을 기준삼고 `이분은 필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신다' 하는 것을 알고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 년 동안 섭리의 목적을 세워서 간곡히 쉬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에 있는 인간들도 하나님과 같이 그 소원의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바라면서 메시아의 심정을,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심정을 준비해 가지고 그분을 만나면 축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같이 살고 그분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결의를 가지고 축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비록 로마의 압정하에 있는 유대 나라요, 비록 로마법권의 치리를 받고 있는 유대 백성이라 할지라도 동방박사, 그외에 모든 증거한 사람이 일치단결하여 `죽더라도 우리는 이분이 탄생한 자리에서 죽어야 되겠고, 우리가 고생을 하더라도 이분을 위해서 고생을 하고,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분이 고생을 당해서는 안 된다. 죽음의 길이 웬말이냐?'라고 하며 나아가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충신 중의 충신이요 효자 중의 효자가 되었던들,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친히 대신할 수 있는 이 땅 위의 실체적인 인간, 예수가 소원할 수 있는 실체적인 인간, 하늘을 대신하여 충신이 되고, 예수를 대신하여 효자 효녀가 될 수 있는 동방박사와 양치는 목자와 그외의 사람들이 되었던들, 예수님은 30여 생애에 아무런 고난의 길이나 고통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록 마구간에서 태어났지만 이분이 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단결해서 한때를 맞이할 때까지, 예수가 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터전을 밟아 나설 때까지 그분의 울타리가 되고 뒷받침이 되었던들, 예수는 출발 당시의 기쁨을 점점 발전시켜 가지고 그것을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단계까지 키워 나갔을 것인데, 동방박사도 간 데 없이 가 버리고, 목자도 간 데 없이 가 버리고 예수를 낳은 어머니까지도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물론이구요. 요셉은 의붓 아버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의 소원과 목적과, 메시아를 축하하는 사람의 소원과 목적이 일치되어야만, 완전한 축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내용이 다르고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하늘이 불러 모았던 모든 사람들, 축하하기 위해서 보냈던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축하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