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은 입력보다 출력이 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64권 PDF전문보기

사랑의 힘은 입력보다 출력이 커

그런데 이렇게 운동하는 세계의 소모를 무엇이 지탱하느냐 이거예요. 사랑의 힘은 입력보다 출력이 크다, 이러한 논리를 세워야 이상적인 밸런스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이 우주의 운동을 일으켰으면 하나님 자체에서 그 힘을 배출시켰을 텐데, 그렇게 힘을 주면 하나님 자체가 소모된다는 거거든. 그런데 어떻게 이 우주가 균형을 취하느냐? 하나님은 절대적 사랑이라구요. 사랑이라는 것은 줌으로써 딴 면에서 보충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영속할 수 있다 이거예요. 사랑을 중심삼은 존재기반이 아니고는 영속할 수 없다는 거라구요. 그것까지는 해명해 줘야 된다구요.

사람들이 자기가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 생명이나 재산이나 모든 것을 투입하려고 그러거든. 그런 거라구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을 떼먹으려고 하는 존재는 없다 이거예요. 공유시켜 가지고 영원히 그것을 보존하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은 거기에서 받은 이상의 힘으로 우주의 공의의 것으로 남기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개인을 사랑한다면, 개인을 사랑하는 그 당대에 자기가 손해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은 우주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우주적으로 이익이 커 간다는 거예요. 우주 안에 그 사랑을 한 것이 커 간다는 거라구요. 복귀섭리도 그렇지 않아요?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욕을 먹고 일을 하지만 상대적 세계의 창조의 역사를 해 나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랑을 위한 투입에는 반드시 창조의 역사가, 여기서는 막더라도 딴 사방으로 벌어져 가지고 창조적 역사가 이루어져 나온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도 '공부하기 싫다' 이러면 요것을 논리적으로 딱 집어넣어 줘야 돼요. 왜 공부하는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을 말이예요. '네가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사랑을 중심삼은 노력을 투입하게 되면, 상대적 세계가 창조되어 가지고 너를 더 큰 것으로 맞아들인다' 고 하는 간단한 개념을 싹 집어넣어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석하면 지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보다 더 투입하면 그것이 보다 큰 가치로 내 주변에 반드시 현현한다는 겁니다.

선한 일을 하라는데, 왜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느냐 이거예요. 그게 그겁니다. 선한 일을 하려면 희생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투입해야 되는 거거든. 투입하면 왜 좋으냐? 천운의 근본, 원인과 결과, 모든 힘의 주체, 주류에 접속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한한 힘의 보급을 받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무한한 힘을 보급받기 때문에 모든 일에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적인 체제가 안 돼 있거든 무턱대고 좋은 일을 하라는 거예요. 두 아이가 싸우는데, 세상 같으면 때리고 울려야 좋고 승리하는 것이 좋을 텐데, 맞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보거든. 저쪽에서 때렸다면, 때린 것을 난 사랑으로 대하는 거예요. 사랑적 대상이 벌어지면 반드시 선한 편에 하나의 때린 거와 같은 대신 존재가 생겨난다고 보는 겁니다.

참는 자가 복받는다고 하는데, 왜 복받느냐 이거예요. 치는 자와 대적하지 않고 치는 자를 사랑으로 품으면 내 사랑의 힘이 상대적으로 돌아 지금 치는 자의 악한 자리에 선한 대상권을 세워 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참아라! 참아라!' 이렇게 말하잖아요? 어떻게 해서, 참는 것이 뭐가 좋고, 착하고 희생하는 것이 왜 좋으냐 이거예요.

사랑이라는 목적을 중심삼고 하기 때문에 서로서로가 사랑의 환경을 공유화시키기 위해서는 치고 때려서는 안 되거든. 치는 자를 대해서 사랑으로 품으려고 하게 될 때는, 치는 사람은 물러가더라도 친 사람 자리에 사랑으로 위하려고 했던 그 대상자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대상자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이 당장은 안 보이지만 주변에 그러한 가치적 내용이 집결돼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나 위할 수 있는 인연을 가져 가지고 전진하는 데에서 우주력과 우주의 선한 창조, 주류, 이상(理想)의 힘을 언제든지 보급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설을 해줘야 젊은 애들에게 쏙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렇잖아? 왜 선한 일, 좋은 일을 해야 되느냐? 왜 참아야 되느냐? 왜 남을 위해야 되느냐? 왜 웃사람을 위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

웃사람을 위하는 것은 웃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위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미래의 모든 소망의 대상자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 얘가 이제 10년, 20년, 30년 미래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겠구나' 하고 웃사람이 본다는 거예요. 사랑으로 보게 되면, 내 자신이 웃사람을 위함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내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다리가 묶여져 나간다, 이 다리가.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힘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 인연을 따른 다리가 엮어진다는 것입니다.

웃사람을 사방으로 위하다 보면 나는 사방으로 연결되어 웃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대상의 자리에 올라가는 거예요.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의 동위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위권에 참석하고 나서는 상속권을 받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서도 웃사람을 존경하면 '아, 우리 동네에서는 누가 제일 좋다' 하는 겁니다. 주변의 웃사람을 위하면 다 좋다고 하는 거예요. 자꾸. 좋다고 말하는 것은 끌어 올려 준다는 거예요, 이게. 동위권에 갖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그러한 내용을 설명해 줘야 돼요. 전부 다 이론적으로 관이 서 있어야 돼요. 관이 안 서 있으니 전부가 혼란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창조 원칙을 우리 인간도 실현해야 된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완성한 인간은 재창조 실현을 통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재창조 실현의 생활이 뭐냐? 하나님이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투입하여 창조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완성한 인간이라면 사랑 이상을 위해 자기를 투입할 수 있는 제2의 하나님적 존재가 돼야 된다 그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의 대상권을 어디든지 연결시킬 수 있어야 된다구요. 만물에 대해서, 사회생활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선한 사람의 생활이다 이거예요.

선한 사람의 생활이 뭐냐고 할 때 논리적 뭐가 없거든. 이상적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창조를 이렇게 했으니, 그래 가지고 완성을 바라서 이상적 사랑 실천장을 추구해 나왔으니, 우리들도 역시 살아 있는 완성한 사람이라면 자기를 투입해 가지고 자기가 머무는 곳, 말하고 행동하는 곳에 재창조 상대권을 반드시 남기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남기고 감으로 말미암아, 남겨진 상대권은 내가 만들었지만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권내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좋아한다 이거예요. 나만 보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이룬 일까지도 좋아한다구요. 그러니 내가 한 일도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분위기권 내에 포괄되어 가지고 우주의 공동화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