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선을 추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216권 PDF전문보기

양심은 선을 추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양심세계와 몸을 두고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 양심이라는 것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모든 선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 나라가 있다면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이 서로 다르게 헌법을 만들어서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결론지어 가지고 그것에 따라서 치리한다고 하더라도 양심적인 사람은 그 다섯 나라의 주권자들 가운데 어느 주권자가 더 선한 주권자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1등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섯 나라들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고르고 제일 나쁜 것을 고를 수 있다구요. 양심은 그런 것을 판단할 줄 알기 때문에 그 다섯 나라들 가운데 제일 선한 편을 따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양심을 교육시키는 것이 목적이겠어요, 몸뚱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목적이겠어요? 「양심을 교육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양심은 다섯 나라들 가운데 어느 나라가 선한가 악한가를 전부 다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나를 관리하고 있는데, 몸뚱이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까 몸뚱이를 치리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미 주체성을 지녀 가지고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교육이 필요해요? 벌써, 좋은 사람을 대하면 마음이 안다구요. 한 번 대하고, 두 번 대하고, 세 번만 대하면 아는 것입니다. '아, 그와 하나 되고 싶다!' 한다구요. 그래, 몸과 마음은 하나 되는 것이 어때요? 몸과 마음이 싸우게 되면 부르르르르…. 양심세계는 싫어한다구요. 양심이 그런 변하지 않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영계가 양심을 터전으로 해서 활동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타당한 논리다 이거예요. 계시를 받는다든가 하는 경우와 같이 영계가 접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어 있어야 되느냐? 그것이 수평이 되어 가지고 요동이 없어야만 영계가 자연히 연결되는 것입니다. 몸뚱이 가지고는 안돼요.

양심이 하나 되는 데 있어서 몸뚱이가 하나 되는데…. 눈도 하나입니다. 두 눈을 통해도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오관이 전부 다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게 올바른데 몸뚱이가 변덕쟁이입니다. 기생 같아 가지고 밤낮 이게 변해요. 눈이 열 개가 되고, 귀도 열 개가 되고, 코도 열 개가 되고, 입도 열 개가 되고, 그 다음에 감정도 열 개가 되는 것입니다. 종잡을 수 없다구요. 그 문을 통해 가지고 악이 들락날락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 들락날락해요. 몸이 이렇게 열 개의 문을 가지고 변덕스러운 눈을 통해 가지고 보니까 마음과 하나가 안돼요. 상치(相馳)가 되어 가지고 외적인 세계에 마음이 할 수 없이 끌려 다님으로 말미암아 인간 자체가 점점점 떨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잘먹는 것을 좋아하지요? 근사한 뱅퀴트(banquet) 같은 데 초대를 받아 가지고 가서 좋은 음식이 나와 있으면 저 가운데쯤에 가서 전부 다 먹고 싶어하는 것이 몸뚱이라구요. 그러면 마음은 '야, 그러면 안돼!' 거기서 하모나이즈(harmonize;조화시키다)를 생각하고, 유니파이(unify;통일하다), 이퀄리제이션(equalization;평등화)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한 자리에 서기 때문이지요. 그걸 안다구요. 선한 자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선한 자리를 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