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제3자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239권 PDF전문보기

사랑은 제3자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

플러스도 플러스끼리 합하고, 마이너스도 마이너스하고 합한다구요. 합한다는 논리를 들어 보라구요. 우주의 원칙에서 플러스 플러스가 상대를 결정할 때는 천운이 보호해요. 상대가 될 때는 누가 건드리지 못한다구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합해져 있는데, 여기에 제3의 플러스가 오면 마이너스가 이리 붙는 게 침해받기 때문에 반작용으로 추방해 버리는 거예요. 상대가 결정되고 나면 우주력과 천운이 보호하기 때문에 거기에 제3자가 들어오는 것은 파괴적인 작용이니,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응관계, 작용과 반작용의 논리가 여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반작용은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 논리를 중심삼고 생각할 때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요?

총각이 장가가기 전에는 총각끼리 합해요, 반발해요? 플러스 플러스끼리 합해요. 총각끼리 송아지 새끼같이 동네를 휩쓸고 다닙니다. 장가가기 전에 총각끼리 합해요, 나누어져요? 합합니다. 여자들은 어때요? 합하는 것은 같은 논리예요. 그러나 처녀 총각이 플러스 마이너스로 딱 하나되어 있는데, 다른 플러스나 마이너스가 오면 반발합니다. 자기의 친구들 가운데 자기보다 미남인 친구가 둘만 있는 자리에 끼여든다 할 때는 어때요? '이놈의 자식, 왜 왔어? ' 해요, 잘 왔다고 해요? 남자들, 얘기해 봐요! 「'왜 왔어? ' 합니다. 」 왜 왔느냐고 하면서 쳐 버린다구요. 이것이 원칙입니다. 종의 기원은 절대적인 사랑에 의해서 결속되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종의 기원은 그들이 주인입니다. 제3자는 불가침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억천만의 사람이라도 같은 사람입니다. 풀잎을 보면 다 같지요? 풀잎의 뼈다귀를 보면 전부 다 같다구요. 그렇다고 종자가 전부 다 같아요? 줄기와 잎사귀가 다 같아요. 잎사귀가 크고 작을 뿐이지 모양은 다 마찬가지예요. 그렇다고 그게 한 종류예요? 원숭이와 사람의 뼈다귀가 비슷하다고 해서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미친 녀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처리해 놓아야 돼요.

사랑은 제3자의 개입을 원치 않아요. 그거 원하는 사람은 손 들어 봐요! 그런 사람은 자기 여편네를 누가 빼앗아가도 좋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진화론을 해결해야 돼요. 진화론이 문제입니다. 진화론의 칸셉과 실재는 공산주의가 문제로 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요? 양심이 보여요? 사랑이 보여요? 인간에게 제일 귀한 것은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 가지 귀중한 것이 하나님, 양심, 사랑입니다. 양심이 있는 것은 다 알지요? 양심이 없다는 사람 있어요? 사랑이 없다는 사람 있어요? 그러나 눈에는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어떻게 해요? 어디나 들어갈 수 있고, 어디나 하나될 수 있는 거예요. 보이면 들어갈 수 있어요? 보이지 않으니 세포 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건 논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어요. 사랑만은 그 누가 제지하지 못해요. 참사랑은 우주가 제지할 수 없고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전부 정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하나님은 외로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사랑의 상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다음에 무엇이 필요하냐? 아들딸이 필요해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에게 상대가 필요하고 아들딸이 필요하지요? 누구를 닮아서 그래요?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이 다 있더라도 사랑의 상대가 없으면 외로운 거예요. 사랑의 아들딸이 없으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최고의 가치를 가진 상대로 지은 것이 아담 해와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을 지었다구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논리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생각한 것이 있었을 거라구요. 자신을 중심삼고 '내 아들은 이래야 되겠다, 내 딸은 이래야 되겠다. ' 하는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했습니다. 」 했다구요. 창조하면서 그 바라는 소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내 아들은 완성하면 이래야 된다, 내 딸은 완성하면 이래야 한다는 표준적 존재, 표준적 완성의 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논리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아들딸이 이래야 된다는 그 기준이 있었고, 그 아들딸이 커서 싸우면 안 되겠으니 형제가 되어 가지고 이래야 된다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공식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이상적인 형제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 시조는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입니다.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대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우리 인간의 종지조상은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의 자리도 하나밖에 없고, 딸의 자리도 하나밖에 없고, 형제의 자리도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형제의 사랑을 지녀 가지고 어떻게 되느냐? 아들의 사랑에 형제의 사랑을 플러스해서 더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