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참하나님

4)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①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가 맺어졌느냐?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이 우주의 중심이 뭐냐고 묻게 되면, 부자지관계(父子之關係)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이 뭐냐? 한마디로 부자의 관계입니다. (48-209, 1971.9.19)

천지의 중심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 부자의 관계라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육친의 아버지 어머니와 아들딸의 관계인 줄 알겠지만, 하나님과의 근본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19-160, 1968.1.1)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면, 혼자 있으면 자극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란 상대 관계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기쁨의 자극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상대적 위치에 서면 비로소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성상이 그대로 실체화됩니다.

하나님이 슬퍼지면 인간도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제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결론은 여기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286)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라고 했는데,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이 무엇이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사랑이 교차되는 그 중심, 생명이 교차되는 그 중심, 이상이 교차되는 그 중심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은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입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초의 인연이 부자관계입니다. (69-78, 1973.10.20)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게 될 때, 얼마만큼 주고 싶어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이만큼이면 됐다 하는 한계를 두고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무한정으로 주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몽땅 주고도 `너로 말미암아 네 안에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게 하는 본질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 가운데 들어가서는 종살이를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밥상 위에 올라가 똥을 싸도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낍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사랑을 주었다고 해서, `나는 완전히 다 주었는데 너희는 왜 안 주느냐? 이럴 수 있느냐` 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주고 싶은 사랑을 다 못 주어 안타까워합니다. 자아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주고자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완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으니 인간세계에 대해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기에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다 줬으니 이제는 너희가 가져와라.` 하는 하나님이라면 필요없습니다. (36-77, 1970.11.15)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투입하여 창조한 인간이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끌려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07, 1968.6.9)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창조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창조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세계 앞에 나타날 때 사랑의 본질로 나타납니다. (86-82, 1976.3.7)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과 이상의 기반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입니다. (69-79, 1973.10.20)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인 상대로서 사랑 관계를 중심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아들딸이 되는 자리입니다. 만일 그 이상의 자리가 있다면 인간의 욕망은 또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최고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응당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48-207, 1971.9.19)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무가치하게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가치하게 지었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에 무엇이든지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었다면 그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지을 때 절대적인 상대로 지었습니다. (54-89, 1972.3.20)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지극히 선한 분이요,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분이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후 온 우주의 귀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참으로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귀한 것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어합니다. (13-247, 1964.4.12)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면 아들딸을 짓는 데에 있어서 시시하게 만들고, 못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같은 동등한 자리요, 동위(同位)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최고의 것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53-226, 1972.2.28)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시라면 그 절대적인 분이 왜 인간을 지었느냐? 돈 때문에 지은 것도 아니요, 지식 때문에 지은 것도 아니요, 권력 때문에 지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에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인간은 아들딸이라는 것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축이 만일 연결됐더라면, 인간과 하나님이 사랑으로 일체 된 관계를 그 어떤 것이 작용하더라도 절대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7-57, 1985.12.1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완전히 투입함으로써 보다 가치있고 이상적인 완전형으로 전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지어놓고 그들을 위해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에서 상대를 위하는 때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에, 대상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원칙이 우주의 근본입니다. (69-83, 1973.10.20)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절대자이고, 전지전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좋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명사, 혹은 좋다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갖춘 자리에 있어야 좋고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혼자 있어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성악가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합시다. 그래서 행복하겠느냐?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좋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65-20, 1972.11.13)

하나님은 완전히 투입해서 사랑의 대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도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는 못합니다. 아무리 절대자라도 그 절대자 앞에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지을 때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아무렇게나가 아닙니다.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120퍼센트, 몇백 배를 투입해서 지었습니다. (197-164, 1990.1.13)

기성교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말씀으로 지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술 부리듯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지성을 다하고 자기 일신을 전부 투입해서 아들딸을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정성을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내 사상 중의 사상, 내 전체 중의 전체를 투입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이상적 출발점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 나한테 와서 달라붙어라.` 하는 흡수가 아닙니다. 투입입니다. `달라붙어라`가 아니라 투입입니다. 그 말을 돌이켜 하면, `위해 존재하는 원칙`에 이상적 출발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투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78-111, 1975.5.6)

하나님이 `나는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밤에도 좋아하고, 낮에도 좋아하고, 일하면서도 좋아하고, 쉬면서도 좋아하고, 춤추면서도 좋아하고, 울면서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사랑이 있다. 몽땅 있다.`고 한 것입니다. `몽땅`이라는 말은 그 속에 전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일 좋아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런 사랑을 몽땅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기에 그 사랑을 맛보면 죽더라도 놓을 수 없습니다. (44-188, 1971.5.7)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아까울 것이 없고, 갖추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그 전부의 가치보다도 귀하게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외에는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108-225, 1980.10.16)

창조이상 완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그것은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이상 완성이기 때문에 창조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물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완성이 없는 한 하나님의 완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인일체(神人一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9-9, 1986.11.1)

신과 일치될 수 있는, 신의 뜻에 일치될 수 있는, 신의 뜻을 중심삼고는 과정적 뜻이 아니라 완성적 뜻의 중심의 핵과 일치될 수 있는 그게 무엇이냐? 그게 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이냐? 전능성 가지고도 안 됩니다. 전권(全權)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무소부재한 소성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게 무엇이 돼야 되느냐? 하나님 자신도 살아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물론 영계가 있어서 시공의 관계를 초월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살아가느냐? 무한한 힘이 있다, 무소부재하다, 전권적인 권한이 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중심삼고 살아간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는 시작도 그렇고, 과정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참된 사랑의 대상을 갖추게 되면 기쁘기 때문입니다. (126-225, 1983.4.24)

하나님은 절대적이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사랑을 그저 주고 주고 또 나누어 주더라도 자꾸 보충할 수 있는 사랑의 창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고에서 사랑을 많이 도적질해가지고서, 밤이고 낮이고 자꾸 사랑을 빼다가 나눠주고 나눠주고 할 때 하나님이 `야 이 녀석아! 도둑놈, 사랑 도둑놈!` 하며 처벌하겠어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 해라. 해도 좋다. 얼마든지 해봐라. 네가 영원히 해봐라. 네가 들어오고도 남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주체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이기 때문에 객체에게 주고도 남아야 주체다. 너희들 객체 되는 사람에게 주고도 남아야 주체로서의 하나님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못 된다. 내가 그렇다!`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서 사랑을 도적질해다가 하나님의 사랑 발전소와 같이 자꾸 나누어준다면 얼마든지 보급해 주겠다.` 그래서 `이거 전부 다 없어지면 내가 또 가져오고 싶은데 하나님의 사랑 파이프에 나를 연결하면 어때요` 할 때 `그것도 하려면 해라.` 한다는 것입니다. (116-241, 198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