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자연은 사랑이상을 가르쳐 주는 교재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참사랑

② 자연은 사랑이상을 가르쳐 주는 교재

인간은 커가면서 자연을 보고 습득합니다. `곤충세계가 이렇구나!` 하고 배웁니다. 달이 비치고 별이 빛나는 가을 밤에 가만히 들어 보면,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하나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립니다. 무엇 때문에 곤충들이 그렇게 우느냐? 그것은 상대를 찾아 이상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새나 다른 모든 동물들도 슬픈 소리, 기쁜 소리를 무엇으로 표시하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따라서 소리를 냅니다. 급은 낮지만, 축에서 먼 거리에 있지만 그 축을 중심으로 평형선을 취하며 돌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37-59, 1985.12.18)

새들의 노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배가 고플 때 신호하는 노래하고, 다음에는 서로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노래하고, 그 다음에는 위험할 때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게 다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는 뭐, 보통사람들은 모르지만 자기들 세계에서는 다 안다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 울면 벌써 안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이 무엇을 중심삼고 돼 있느냐? 배고픈 거야 한 번 먹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뭐 위험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노래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느냐 하면, 상대와 주고받는 관계에서 노래가 오고 간다는 겁니다. (137-212, 1986.1.3)

인간은 주체와 대상, 즉 상대적인 쌍으로 지은 바 되었고, 또 인간을 위하여 있는 온 만물세계도 사랑의 원리 아래 조화를 이루고 또 인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이상을 실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특히 자라나는 아담과 해와에게 있어서는 사랑의 교과서요, 사랑의 진수가 무진장으로 진열된 박물관이라는 것입니다. (135-12, 1985.8.20)

모든 새나 동물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을 중심으로 화동합니다. 꽃과 나비는 극과 극이지만 서로 화합합니다. 이것은 천지 조화입니다. 우주의 극과 극이 사랑을 중심으로 화동이 벌어집니다. 철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에 있던 새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북쪽에 있던 새가 남쪽으로 날아가서, 지역을 넘나들면서 사랑을 이룹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영원히 돕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하나님이 지은 박물관의 교재를 통해서 배웁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좋아 사랑하면 천하의 모든 만물들은 거기에 박자를 맞춰 화동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좋아하면 천사세계도 좋아하고, 이 모든 피조세계가 좋아 박수를 보내고 찬양을 보냅니다. 노래할 줄 아는 새는 노래를 부르며 찬양하고, 아름다운 꽃은 향기를 풍기며 찬양합니다. 최고 사랑의 주인공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향취의 분위기를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 이 피조세계입니다.

보기에 흉측스러운 두꺼비도 사랑을 할 때는 `욱욱욱` 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다리를 척척 치고 뒷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사랑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것은 최고의 예술입니다. (142-274, 1986.3.13)

봄이 되어 새가 노래를 하면, 그 새의 노래를 듣자마자 자기 아내를 생각하고 자기 자식을 생각하고 자기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하나님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새는 새들끼리만 생각하지만 인간은 관계성을 갖습니다. 동물세계·식물세계·천상세계의 중간 매개체로서의 관계성을 가진 것이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전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131-127, 1984.4.22)

아담과 해와는 성숙해감에 따라서 `아, 저렇게 사랑하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세계를 인간 사랑이상을 성숙시킬 수 있는 교재로 펼쳐 놓았습니다. 그걸 배워 가는 것입니다. 점점점 커감에 따라 `아하, 옛날에는 동생과 같이, 오빠와 같이 지냈는데 가만 보니까….` 이렇게 감정이 달라집니다. `아, 이렇구나!` 하며 배워 갑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죽더라도 안 만나면 안 되겠다. 딴 데 못 간다.` 하고 평형선으로 직행하면서 부딪치게 됩니다. (137-60, 1985.12.18)

사랑은 신경과 같습니다.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를 당기면 몸 전체가 끌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만 당기면 우주가 끌려오고, 사랑만 움직이면 우주가 다 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춤도 추게 됩니다. 춤은 왜 생겨났느냐? 사랑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또 노래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고, 웃음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사랑을 빼게 되면 전부 다 굳어집니다. (89-91, 1976.10.4)

사람은 벌보다는 나비를 좋아합니다. 나비가 춤을 추며 날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는 것은 박자에, 가락에 맞추어서 납니다. 빨리 나는 놈도 박자에 맞추어서 날고, 느리게 나는 놈도 박자에 맞추어서 납니다. 나는 형은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전부 박자에 맞춰서 납니다. 또 산에서 사슴이 뛰어다니고 토끼가 노는 것도 음악적입니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것이 하나의 리듬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는 것도 음악적입니다. 사람도 무엇을 먹을 때 아주 음악적입니다. 그게 다 음악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런 이 우주를 영원히 나를 위해서 만들고, 나를 위해서 장치했다면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경꾼처럼, 이웃동네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도 높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산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 좋으냐, 밋밋하고 평평한 것이 좋으냐?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 좋습니다. 그거 왜 그러느냐? 그 모양이 춤추려고 하는 어떤 형을 갖기 때문입니다. 별의별 모양의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면서 가지각색의 형태를 나타내면서 형성되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춤입니다. 자연 가운데는 멋진 춤이 있고, 멋진 음악이 있습니다. 멋진 예술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연 가운데는 참 많습니다. (87-322, 1976.6.27)

맨 처음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남을 입은 아담과 해와도 하나님의 보호권 내에서 어렸을 적부터 자라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커가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지능이 발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피조세계를 지었는지를 알게 되고, 그 피조세계를 통해 교육해 나오는 겁니다. 피조세계가 움직이는 모든 것은 우리 인간 시조, 본래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과 해와가 생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교재였습니다. 완성된 아담과 해와가 아니기 때문에 이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표본이요, 하나의 박물관이었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만 됩니다. (137-127, 1986.1.1)

아침에 눈을 뜨고 자연을 바라보면, 그 자연이 은은하게 내 본성과 인연되어 새로운 이상의 감정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바라보면 볼수록 절망과 슬픔의 감정을 돋구어 준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 하면,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와 같은 정도의 가치로 지어진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피조만물의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간이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모습으로 천상을 대신하여 나서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9-97, 1960.4.24)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의 왕, 혹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훌륭하다는 물건에 비할쏘냐. 골동품에 비할쏘냐. 어떤 유명한 부인이 입고 있는 호화로운 옷에 비할쏘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세계 앞에 자신도 모르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볼 때,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에 비할쏘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훌륭하겠는가.` 하며, 하나님이 심정을 기울여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무엇보다도 귀하게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이는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은 인간을 그러한 자리까지 내모는 것입니다. (9-176, 1960.5.8)

자연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길가에 값없이 서 있는 나무 하나도 유명한 화가가 그린 어떤 그림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가 최고의 걸작품으로 꽃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린 그 화폭에서는 아무리 쳐다보아도 꽃이 피지 않습니다. 향기도 나지 않습니다. 또 씨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값없이 길가에 서 있는 나무에서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씨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씨를 심으면 그 나무보다도 더 좋은 나무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87-320, 1976.6.27)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귀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제일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귀여워할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돼요? 탄식하는 만물의 한을 해원해 주어야 할 책임을 진 여러분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6천 년 전 그것들을 지으실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의 손길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눈물지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도 울 수 있어야 됩니다.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외로웠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많이 울어 보았습니다. 바위를 붙들고도 울어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도 울어 보았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이제 말씀을 들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치 있는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인연을 맺은 귀한 만물이, 오늘날 어떠한 왕궁에서 뭐 국보니 보물이니 하며 귀하게 여기는 물건만큼의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서글픔을 나는 알아줘야지. 나만은 알아주어야지.` 하면서 나왔습니다. `이 땅에 사는 세계 인류가 전부 몰라주어도 나는 알아줘야지.` 하는 마음을 여러분들이 가진다면, 이 민족은 앞으로 세계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어느 누가 만물을 놓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가문의 보물보다도,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 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여겨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합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주고 그것을 붙들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고 `오냐.` 하십니다. (9-176, 1960.5.8)

자연은 뭐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위하는 사랑을 가진 아들딸이 태어날 때 위할 수 있는 만물로, 선물로 준 전시품입니다. 새 소리 하나,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라도 사랑의 아들딸들의 생활의 미화를 위해 만들어진 장식품이라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굴러가는 바위도 아들딸이 나라를 다스리는 주인이 될 것을 알고 그 나라의 장식품으로 지었다는 겁니다. 흐르는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우면 안 되겠으니 조화무쌍한 화합의 동산, 사랑을 위하는 그러한 세계를 보고 그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꿈의 왕자, 희망의 왕자를 만들기 위해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통해서 배우는 겁니다. 수놈 암놈이 `짹짹` 할 때는, 이것을 주인 되는 아주머니도 배우라는 겁니다. 서로 위하는 세계를 향해 자기 일생을, 생명을 걸고 사는 본연의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집 울타리에 새 새끼도 와서 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새끼를 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박물관에 있는 무슨 작품이 아무리 귀중하다고 해도 살아 있는 작품에 당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작품인 이 지구성 만물 박물관을 누가 하나님 이상 사랑했느냐 이겁니다. 자기 나라의 박물관 이상 사랑했느냐 이겁니다. 길가에서 밟히는 민들레 짜박지 한 포기도 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금관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건데?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너를 본연의 하나님이 위할 수 있는 왕의 자리에서, 사랑을 받던 그 자리에서 사랑을 못하는 내 자신이 미안하다. 부끄럽다.` 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위하는 그런 왕이 있다고 할 때는 풀포기도 그 왕을 따라가서 영원불변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인간인 것입니다. (175-187, 1988.4.16)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상징적 존재요, 인간은 실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과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70-182, 1974.2.9)

언제나 자연을 사랑해야 됩니다. 자연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을 사랑해야 됩니다. 인간 가운데서도 오색인종을 다 사랑해야 합니다. `어, 나는 백인들만 좋아.` 하나님이 그럴까요? 그러면 전부 흰 옷만 입어야 됩니다. 백인들은 전부 다 흰 옷만 입어야 됩니다. 색깔 있는 옷은 전부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검정 옷은 왜 입어요? 색깔이 있는 옷은 왜 입어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133-30, 1984.7.1)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느껴야 됩니다. 모든 미물까지 사랑하고, 사람은 물론이요, 모든 하늘에 있는 것까지 무형의 것, 유형의 것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에 새가 짹짹짹짹 할 때는 `야, 요놈의 참새야, 내가 늦잠 자려는데 왜 짹짹짹 해` 하지 말고, `아이고, 너 고맙구나. 아이고, 나를 깨워 주러 왔지? 하하, 귀한 손님이 나를 맞으러 오는 걸 네가 알려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상이 다릅니다. 이게 바로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112-219, 198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