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죽음 앞에서의 자세 - [8대교재교본] 천성경 지상생활과 영계

⑨ 죽음 앞에서의 자세

예수님이 다 가르쳐 줬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느냐?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죽는 데는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뭐냐?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데도 무슨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인간의 목적이 전부 다 다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목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그 목이 하나밖에 없는데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죽어야 되느냐? 저 밑창에 가서 죽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34-184, 1970.9.6)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중심삼고 죽어야 됩니다. 하늘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큽니다.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하늘나라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죽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는 데도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죽는 데도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시시하게 한국적인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국적인 것 가지고는 아무리 죽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 하나님의 심정의 나라를 중심삼은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늘나라 복판에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제일입니다. 천하가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34-185, 1970.9.6)

오늘날 우리는 최후의 부활의 한날, 소망의 한날을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라고 있는 그 소망의 때는 만민이 즐길 수 있는 소망의 때로되, 그때는 쉽사리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죽음을 이긴 자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탄과 싸운 자만이 차지할 것입니다. 그 소망은 하늘을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핍박을 받은 자라야만이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때가 우리 앞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생활환경을 넘어서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에게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그 소망의 한날을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 끌어들여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을 한다는 사람은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죽을 것인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80년 살다가 죽는 그 시간에야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최후의 한날을 장식할 것이냐`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음의 자리에 가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분은 인생행로에 승리하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느 한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놓고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그때 어떠한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길은 친구도 없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형제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부부, 사랑하는 자녀도 없는 길입니다. 오로지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시 가 볼 수도 없고, 갔다가 올 수도 없고,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입니다. 이런 길을 가게 될 때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을 갖고 갈 것인가? 여러분이 죽음에 봉착하는 그 순간에 그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이 없다면 거기서 마지막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죽음의 길 앞에서 후퇴한 자들이 아니라 죽음을 비웃고 죽음을 늠름하게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길을 세워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길을 넘고 나면, 나는 하늘 앞에 떳떳이 서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마음으로 동경하던 본향을 향해 기쁨으로 달음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세계를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해야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나중에는 죽음 앞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죽음까지도 지나가 버리게 하는 승리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하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고통의 길이나 슬픔의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쁨의 장면이 있으면 그 기쁨의 장면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그리는 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6-53, 1959.3.22)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슬픔과 기쁨이 뒤넘이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기쁨은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는 기쁨, 즉 죽음을 넘어서 남아질 수 있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슬픔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고 즐거움도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면, 인간이 기쁨을 찾고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는 그 마음도 죽음과 더불어 끝날 것이냐? 아닙니다. 마음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심정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런 세계가 실제로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인고로 그 생명이 영원합니다. 하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늘을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가고, 많은 사람이 싫다 하는 길도 소망을 품고 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통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고,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죽음의 길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경하는 마음이 현실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과 슬픔, 혹은 죽음보다도 더 강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후회할 자요, 슬픔과 고통 앞에서 후퇴할 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영원한 세계를 가셨기에, 부활의 세계를 건설하였기에, 오늘날 우리도 어차피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인간이 슬퍼하는 죽음의 고개도 기쁨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의 소망을 품은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음을 앞에 놓고 세상만사를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늘 앞에 서서 자기의 죽음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소망의 아들딸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자리에 서서 하늘의 기쁨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늘에 대하여 울부짖는 무리가 있다면 하늘이 그 울부짖음에 응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6-54, 1959.3.22)

뜻을 위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뜻을 위해 죽어야 할 자리에서는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기 전까지는 내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하나님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혈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명이 사탄편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과 인연 맺어지는 것입니다. (34-47, 1970.8.29)

생명과 죽음을 두고 볼 때 어느 것이 강하냐? 죽음보다 생명이 더 강하냐? 생명보다 죽음이 더 강하냐? 사탄세계에서는 생명보다 죽음이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뜻을 알고 난 후에는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기 싫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서는 어차피 죽어야 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지내지 않고는 다른 시대를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께서 영원히 가질 수 있는 생명을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세계의 타락한 혈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을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역설 같지만 타락과 복귀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의 정상적인 논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선생님이 이 길을 출발할 때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느냐를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죽을 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때는 무슨 말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역사해야 되겠기 때문에 죽을 자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죽을 자리라면 어디일 것이냐? 원수와 대결하는 자리, 즉 원수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원수의 본거지를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를 중심삼은 뜻의 기반이 사탄편에 돌아갔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하여 사탄의 소굴인 북한으로 간 것입니다. 선생님이 금후에 세계적인 공산당과 싸워야 되겠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북한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쇠고랑을 차고 영어의 몸이 될 것을 각오하고 철천지 원수의 나라를 찾아간 것입니다. 아무리 포악한 시련이 덮쳐오더라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극한 굶주림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위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조직적인 생활권 내에서 아무리 조이는 생활을 하더라도 하늘의 법도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34-47, 1970.8.29)

선생님은 모든 일이 구속당하더라도 그 구속당하는 기준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었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출발의 동기와 새로운 삶의 보람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별의별 중노동을 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안 꺾인다. 다른 사람은 다 죽더라도 나는 안 죽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살고자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통일교회의 뜻을 알고 나서 죽음을 각오했습니까? 자유당 시대의 특무대장 김창룡 살해사건의 주모자인 허 대령이 사형을 당할 때에, 이번 일을 계획하고 지시한 자로서 한이 없느냐고 물으니 그는 아무런 한이 없다고 하면서 사내답게 죽어갔습니다. 그런 살해사건이나 총살사건이 생기면, 그것을 자신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비교해 보면서 나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모함으로 국가의 대반역자로 몰려 죽을 수도 있을 것이요, 동지의 모해나 친구의 모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해 등 여러 가지로 인해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에는 세상을 위하는 마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원수를 맺지 말고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왕 죽을 바에는 원수를 맺지 말고 무엇인가를 심어 놓고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가 아닌 친구로서 사랑하면서 죽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34-48, 197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