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통회와 새결심의 가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02권 PDF전문보기

베드로의 통회와 새 決心의 價値

하늘을 향한 신앙노정에 있어서 영원불변의 모습으로 우주적인 사명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밀고 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이 일변해서 일생 동안 주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충동감이 일어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신의 자아를 깨닫게 될 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과 자기와의 관계, 혹은 서로의 생애노정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더욱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뜻 하나를 위해서, 이 땅 위의 만민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전부를 하늘앞에 제물로 바치고, 십자가에 끌려가시면서도 원망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 제자는 자신들의 생애가 너무 개인중심적이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중심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제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님이 늘 소원하시던 뜻을 인계맡아 이 땅 위에서 그 뜻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베드로는 어떤 것을 느꼈는가? 자신의 불신을 느끼는 동시에 주위의 불신을 느꼈던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죄 없다고 할 예수 그리스도를, 악한 주위 사람들이 묶어 놓고, 채찍질하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핍박당하시는 예수님의 시선 속에서 예수님의 서글프고도 외로운 마음을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입장에서도 하늘길을 지켜나가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시선 앞에 베드로는 주위 환경의 불손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 될 수 없는 악한 무리들을 멸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위의 불손한 세력과 싸우겠다는 정의로운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나가는 예수님의 선한 불변의 모습과 주위환경의 불손함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돌아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통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어리석었던 생애를 청산할 수 있었으며, 주위환경을 정화하여 선의 기준을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더더욱 하나님께로 향했던 것입니다.

말없이 하늘을 위하여, 땅을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뜻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을 통해 베드로는 저절로 주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 돌아가심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최후로 돌아보셨던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을 알아주는 사도가 있음을 느끼게 했고, 끊어졌던 하늘과 인간의 인연이 회복되는 순간임을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베드로 혼자만 하늘과 땅, 그리고 만민과 수많은 사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뜻 앞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이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고난당하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만이 통곡하면서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도들을 중심삼고 역사할 수 있는 기준, 예수님과 인간들이 서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만을 붙들고 부활과 재림의 때를 고대하던 것과 같은 입장을 여러분들도 어차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입장도 탕감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노정에 남아진 최후의 운명이라 할 진대, 여러분들은 심각한 입장에서 진지하게 예수님과 자신 사이를 되돌아 보면서 예수님의 지조를 본받을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그 자세 앞에 몸 굽혀 통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믿고 나오는 신앙생활 가운데서 주님이 우리를 염려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얼마만큼 염려하면서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자신은 예수를 염려하면서 일생동안 살았다고 하지만, 어찌 죽음의 자리를 헤쳐나가면서 베드로를 바라보던 예수님의 생애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탕감복귀원칙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음의 길에서 무리들을 돌아보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죽음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돌아볼 줄 아는 자신들이 되어야 합니다.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신하는 입장에 서는 동시에 예수님을 영광의 자리에 모셔 드리기 위해 우리가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염려를 대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한 때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그런 한때가 없다면, 끝날 즉 부활의 영광을 맞이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나의 주'요, `나의 신랑'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베드로를 돌아보심으로써 비로소 베드로와 세 제자는 찾았으나 예수님을 직접 붙들고 천국까지 가 있는 성도들은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