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고개는 탕감의 고개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7권 PDF전문보기

아리랑 고개는 탕감의 고개

젊은이들을 가만히 보면, 얼굴이 붉으스름해 가지고 높은 산도 한걸음에 뛰어 넘을 수 있을 것같은 열망에 벅차 있습니다. 그러면 눈 앞에 보이는 그 산만 넘을 것이냐? 모르는 사람은 저 산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산을 넘고 나면 또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넘어도 또 다른 산이 있고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꼭대기에 다 올라갔다고 거기서 잠을 자서는 안됩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면 평지로 다시 내려와, 세계의 산맥을 향해 호령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은 꼭대기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맨 밑 평지에 내려와서 자야만, 그 사람은 모든 산정을 승리적으로 넘은 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산을 오르고 넘어서 골짜기에 있더라도 그 산을 주름잡고, 세계의 모든 산에 호령하더라도 '당신 앞에는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낮은 골짜기에 있더라도 세계의 모든 산을 정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꼭대기에서 내려오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느냐? 복귀섭리도 이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을 보게 될 때, 자기 나름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한 고개만 넘으려 합니다. 그러나 간신히 그 고개를 넘더라도 그곳이 태평왕국의 성문을 앞에 두고 안식하고 환영할 수 있는 터전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개가 지금까지 넘던 고개보다 좀 낮으면 문제가 안 될 텐데, 올려다 보면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고개, 두 고개, 세 고개를 넘었다면 그 다음엔 몇 고개나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한국 민요 중에 아리랑 노래가 유명하지요. 선생님이 아리랑 해설가는 아니지만 노래가 끝나는 부분에 사랑동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민요를 잘 모른다고 할 거예요.

삼천만 민족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개가 무엇입니까? 고개를 잘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개는 열 두 고개인데, 여러분은 열 두 고개를 넘었습니까? 넘지 못했으면 아리랑 고개나 불러요. 여러분은 아리랑 고개를 몇 고개나 넘었습니까? 아리랑 고개가 꼬불꼬불하다고 아리랑 고개입니까? 그것은 아리랑 고비이지, 아리랑 고개가 아닙니다. 그럼 넘어가는 데, 내려가면서 넘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삼천만 민중이 이 고개를 아직 못 넘어 봤다고 생각합니다. 몇백만이 수없이 불렀는지 모르지만, 거기를 완전히 넘어 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넘어 봤습니다. 그것이 실례가 됩니까? 앞으로 그럴 수가 있다는 한국의 민요와 창은 참 잘 지어졌습니다.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보면, 복귀섭리를 설명하는 데 적절한 예화(例話)가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리고, 심청이가 부모를 모신 그 효성 얼마나 갸륵합니까? 이와 같이 앞으로 올 본연의 세계에서는 주님을 그렇게 맞이해야 하고, 참부모님을 그렇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여 넘어왔으니,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타락되어 그렇지만, 본래 인간은 산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덴 동산은 평지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평세계의 불기둥과 같은 높은 산야의 꼭대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바른쪽의 선한 곳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그들은 창조하지도 않은 무원리권내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산정에서 출발할 때 잘 넘어갔으면 순리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했을 텐데, 처음에 잘못 넘어갔기 때문에 역리적으로 수고의 노정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