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에서의 성혼식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2권 PDF전문보기

박해 속에서의 성혼식

1960년에 행했던 성혼식의 배후에는 아담 이후 예수님 때까지 4천년, 예수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년의 역사과정에서 걸렸던 모든 것을 탕감조건을 세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다. 그 행사는 세계적이고 천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에 대한 박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1953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은 박해의 시기였다. 그 기간에 적어도 360만명 이상의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3개 이상의 교파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래도 탕감조건을 승리권내에 세운 것이 1960년에 있어서의 선생님의 성혼식이었다. 그날이 통일교회의 운명을 결정한 최초의 날이었다.

선생님의 성혼식은 지상에 있어서 기념할 만한 세계적 천주적 대사건이었다. 세계적 기준에 있어서 종적 탕감조건을 횡적으로 이 지상에 해결하는 실체로서 영육 아울러 승리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성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은 성혼식 전에 예수님의 3제자, 반역한 그 제자를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었다.

성혼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아담 가정을 탕감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들의 어버이인 아담과 해와는 부부관계에서 타락되었다. 타락이 부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까 복귀는 한 사람으로는 안 된다. 남자 혼자서는 복귀되지 않는다. 여자 혼자서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이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한 아담 해와 입장을 복귀하여 참부모의 기준을 지상에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는 세제자의 약혼이라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