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소망하는 아들딸이 될 수 있겠느냐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7권 PDF전문보기

너는 소망하는 아들딸이 될 수 있겠느냐

오늘날 모든 종교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거기에 하나되고, 거기에서 화합하여 일체가 될 수 있는 자신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천당가자고 하는데, 자신도 못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처럼 모순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해야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나 예수 믿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쌍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딸이면 딸, 아들이면 아들이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여러분은 시대가 바라는 소망 앞에 어느 한때는 등장함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딸이 되겠느냐, 너는 이런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이 역사의 소망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김생김이야 어떻든 간에 충신이 될 수 있고, 효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굴이 잘났다고 해서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니요, 못난 사람이라고 해서 충신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김생김이 문제가 아니예요. 외적인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골수로부터,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체휼하면서 천만번 흐느껴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당신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부르짖고 나설 수 있는 참된 효자의 모습, 참된 충신의 모습을 하나님은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아담 해와의 몇백 배 몇천만 배의 가치를 지니고 본연의 진실된 효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영광된 모습으로 머리 숙일 수 있는 효자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효자라고 하더라도 흠이 남아 있는 모습, 타락의 역사를 청산짓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연결되어 미래에 흠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여러분을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딸이라 부르시는 그 내심에는 얼마나 부족함을 느끼고, 그 내심에 얼마만큼 큰 아픔과 상처를 품고 대하시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신앙자세를 새로이 점검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고 아담은 또 얼마나 반가와 했습니까? 그때의 인상이 하나님의 가슴에 남아져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에덴에서 아담 해와를 찾아 나설 때의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아담아' 하고 자식을 부를 때의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그 자녀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얼굴과 보이는 모든 부분 부분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느낀 자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때의 하나님 마음에는 희망이 넘쳤고, 행복이 싹텄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원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영원한 대상으로 섰다면, 그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일시에 탕개줄이 뒤틀려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파탄을 당하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아픈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가뜩이나 소망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나서야 하는 억울함에 하나님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해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다시 들어가서 그 문제를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고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