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인연을 맺는 사람이 되어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9권 PDF전문보기

선한 인연을 맺는 사람이 되어야

오늘의 자각된 `나' 는 과거의 `나' 와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인연이 되어 있던 형제 친척 혹은 국가나 세계나 인류보다도 오늘의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빚어지고 갖추어질 수 있는 인연은 보다 가치 있는 인연이어야 합니다. 즉 선한 부모의 인연, 선한 형제의 인연, 선한 종족의 인연, 선한 민족의 인연, 선한 국가의 인연, 선한 세계의 인연을 맺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자각해야 됩니다. 또 그것을 자각했더라도 나를 위한 생활을 해서는 선이 안 됩니다. 자각은 자기가 했지만 그 생활은 나를 위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느낀 사람은 과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현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만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인 수많은 가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요, 금후에 올 나라를 계승할 수 있고 세계를 계승할 수 있는 가정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 살되 자기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금후에 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뚜렷하게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각된 나를 중심삼고 선한 생활, 즉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선한 세상에 인연을 맺을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악의 인연으로 갖추어져서 악의 생활 가운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중심삼고 이 악의 인연을 넘어 그보다 넓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인연을 남겨야만 탕감복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감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어떤 것에 희생의 조건을 대신 세워가지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손해를 입었으면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 열 이상의 이익을 가져 와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해온 탕감은 조건적인 탕감이었습니다.

탕감조건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마운 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95퍼센트는 하나님이 책임이고 5퍼센트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공식같이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조건적인 탕감을 한다는 것이 지극히 슬픈 사실입니다. 그 조건적인 탕감을 조건적 탕감이 아닌 기준까지 올려 놓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수고와 노고가 개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된 선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면목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백 퍼센트 이상 탕감의 길을 모색하는 생애노정을 가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탕감조건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발판을 남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에 대해서는 효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요, 온 세계에 대해서는 성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느냐?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고 승리의 한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의 승리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민족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현실을 위해 사는 것과는 상충적인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현실에서 배척 받는 것이요, 고독한 것이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응당히 자기가 당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생활하는 사람은 무리 어려운 탕감조건이 가로놓이더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두고 볼 때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역사를 위하여 일하고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승리의 기를 높이 드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만민이 추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알았기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하여도 좌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은 악을 영원히 주관할 수 있지만 악은 선을 영원히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악이 선을 기만이나 강압적으로 주관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선은 결코 악에게 영원히 지배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선이 악에게 영원히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