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신앙생활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29권 PDF전문보기

감사하는 신앙생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한 것이요, 이제부터 가야 할 세계적인 개척노정의 95퍼센트의 사명도 나를 위해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타락한 인연을 넘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입장에 처해야만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좋은 때만 우리를 위해 수고해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수고하실 것을 다짐하고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서는 나 대신 일하시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좋은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더욱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중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칙을 이해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 누구겠느냐? 문명국가나 문화생활을 하는 사회에서 수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보다 저개발국가의 형편없는 생활환경 가운데서 수난의 길을 가는 운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심정적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엇갈려 남아질 수 있는 자리는 놀고 뛰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상봉할 수 있는 자리, 눈물이 교차되는 자리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혁명의 봉화도 새로운 혁신운동도 그런 자리에서 역사를 중심삼고 엮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나가게 될 때, 우리가 지금 생활하는 이상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그 이하의 자리에서 감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는 입장에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입니다. 나보다도 하나님이 더 불쌍한 입장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어간다면, 물론 자식도 불쌍하지만 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가 더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식이 죽어가는 자리에서도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효를 다한다면, 부모의 서러움, 부모의 고통, 부모의 비참함을 메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를 중심삼고 볼 때도 나보다도 더 불쌍한 분은 하나님이 아니겠어요? 언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날을 갖지 못하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감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감사는 나에게서만 끝나는 감사이지, 하나님과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은 감사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보다도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것은 효하는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효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부모가 슬퍼하는 일에 대해서 자식이 먼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부모는 그 자식을 무한한 소망의 실체, 자기의 모든 생명을 대신한 가치의 존재로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부모는 필요 이상의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아버지의 목전에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나 자신이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하루의 낮 저녁 밤을 절기로 보면 춘하추동을 축소시킨 것입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고,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고,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면,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년사시를 대신할 수 있는 이 하루를 어떻게 생활하면 아버지가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이 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아버지의 목전에서 해야 할 효의 도리요, 충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들은 새벽에 일어나면 인류를 대신한 존재인 나의 하루 생활이 아버지 앞에 감사의 실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꽃이 피어 있는 봄동산처럼 자유스런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워 섭리하실 수 있는 소망의 결실체가 되겠다고 하고, 낮이 되어 일터에 나가면 소망의 결실체가 자라나는 여름절기와 같이 자기가 한 발 더 발전하여 하나님께서 같이하실 수 있는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되겠다고 해야겠습니다. 또 저녁이 되면 모든 전체를 집약시켜서 하나의 결실을 아버지 앞에 바칠 수 있는 가을절기와 같은 때이기 때문에 제물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겠다고 하고, 겨울절기에 해당하는 밤이면 생명력을 지녀서 하나님과 내재적인 부자의 인연을 맺어 모든 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 365일을 승리의 날로 만들면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사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경험을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일생을 감사하는 생활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죽음의 자리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아야 하고, 1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일생 동안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도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의 아침 낮 저녁 밤, 일년의 춘하추동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그렇게 살고 간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창조 본연의 목적에 합격된 하나의 승리적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승리적 기반을 어디에서부터 닦아야 되겠느냐? 하루를 두고 볼 때, 아침은 봄과 유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낮은 여름과 청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저녁은 가을과 장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밤은 겨울과 노년시대를 대신한 것이요. 이와 같은 생애를 감사하며 일생 동안 사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에게서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환경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