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4권 PDF전문보기

우리는 예수의 사상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비록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했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한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한뿐만 아니라 심정까지도 체휼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원한이 맺히게 했던 원수를 대하여 싸우는 데는 자기 개인의 상대 입장에 있는 원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에 남아 있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사탄 주권의 무대를 놓고 이것을 책임지겠다 하는 입장에서 나서서 싸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들된 입장에서 원수와 싸우는 데는 세계적인 원수와 싸워서 그 원수를 굴복시키겠다는 결의를 갖고 하나님이 믿을 수 있은 자리에 섰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당하는 데는 하나님의 고통을 대신 받고, 책임을 지는 데는 하나님이 지실 책임을 대신 지고, 싸우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계에 남아 있는 사탄을 처치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을 살아서는 못 이루지만 죽어서 이룰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그 길을 택하고 나선 걸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걸음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개개인은 예수님의 사상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부의 자리에 서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오빠로 모셔야 하고, 아버지로 모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신랑으로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세가지의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오빠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의 남자 아담을 대하던 해와가 이 세 가지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 해와는 이 세 가지의 사랑을 복귀해야만 신랑을 대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 오빠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 신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타락한 해와의 운명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 신랑을 만나기는 현재 이 시대에서 만나지만, 신랑과 여러분은 역사적인 출발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면 신랑의 가문의 도리를 따르고 그 가문의 전통을 본받아야 됩니다. 또 신랑이 행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심정 생활에 있어서 신랑과 언제나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슬플 때 신부가 기쁠 수 없으며. 신랑이 외로울 때 신부가 안식하는 자리에 설 수 없으며, 신랑이 비참할때 신부가 행복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신랑이 비참하면 신부도 당연히 비참한 것이고, 신랑이 행복하면 신부도 당연히 행복한 것입니다. 즉, 운명이 자기 주장으로 말미암아, 자의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랑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자리가 신부의 자리인 것입니다.

신부를 두고 보면, 신부는 신랑을 잘 맞이하느냐, 못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그 출세가 좌우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여자라 하더라도 한번 신랑을 잘못 맞이하게 되면 그 훌륭한 빛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부의 운명은 남편의 운명과 같은 입장에 서기 때문에 신부가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남편의 운명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신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신랑으로 찾아올 수 있는 분은 어떤 분이냐? 아버지의 입장에서 찾아오시는 분이요, 오빠의 입장에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나와는 완전한 형제의 정으로 결합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와 나는 남매지간이요, 그는 우리 오빠다 하는,세상에서 자기를 낳은 아버지가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고, 세상의 혈육. 혹은 오빠가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오빠나 아버지를 부정하면 부정했지 그를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