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해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49권 PDF전문보기

사랑의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해

자, 우리는 절대적인 신의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신의를 세워야 되겠어요. 통일교회 문선생과 하나님 사이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끊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끊을 수 없다. 못 끊는다' 하는 신념이 있으면 그 신념을 누구도 못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제아무리 고문틀에 매어 놓고 들이 짜도 그 신념만은 못 빼앗아 간다는 거예요. 민주세계의 그 무엇도 그 신념만은 못 빼앗아 간다구요. 공산당이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민주세계의 무슨 주의가 무슨 주권이 아무리 뭐라고 한다 하더라도 못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삼국을 거쳐왔습니다. 왜정과 공산당과 민주세계를 대표한, 이 대한민국 해서 삼국을 거쳤어요. 또 삼주권을 거쳐왔습니다. 자유당, 민주당, 혁명정부. 그 다음에는 삼교단을 거쳐왔습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그들은 전부 통일교회를 반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삼 족속이 반대한 거라구요. 망할 족속, 중간 족속, 흥할 족속이 다 선생님을 반대한 거라구요. 거 왜 그래야 되느냐? 일등을 뽑으려니 할수없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일등을 뽑으려니 경쟁을 해야지요. 경쟁을 하게 되면 반대하는 거라구요. 있는 재간껏 다 해보는 것입니다.

요전에는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사람이 그래요. `통일교회를 사실 반대했지만 이제는 기력을 잃었소. 아무리 반대를 해도 반응이 없기 때문에…' (웃으심) 그 무엇이 와스스 해 가지고…. 그렇잖아요? 여러분, 가을에 밤나무에 밤이 가뜩 열려 가지고 누릿누릿하게 익은 알밤들이 `내 얼굴 좀 보소' 하는 듯이 아가리를 쫙 벌려 가지고 주렁주렁 달려 있다면 아무리 신사요, 도를 닦는 도인이라 하더라도 `아이고, 저 놈 돌이라도 한번 집어 던지면 와스스 떨어지겠구만' 하며 관망하다가 도인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돌을 들어 던지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죄예요, 죄가 아니예요?「아닙니다」알고 했을 때는? 죄입니다. 자신도 모르고 했을 때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구함을 받을 때에는 자기가 알게 구함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구함을 받는 거예요. 제일 심각한 자리에 들어갔을 때 무사통과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해버리는 수가 많아요. 그럴 때에는 하나님 법에도 안 걸리고 사탄 법에도 안 걸립니다. 갖다 붙일 말이 지천이예요. `그 얼마나 밤을 사랑했으면 그랬을꼬'하는 용서가 나올 수 있는 거라구요. 그 얼마나 밤을 그리워했으면 그랬을꼬… 그 주인보다 천 배 더 그리워해 가지고 그렇게 했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구요.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동정의 요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 나무의 주인은 백정놈보다 더 악한 사람이었는데 그거 잘했지'할 수도 있다구요. 악당들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것을 중심삼고 본다면, 하나님은 말이예요. 하나님이 보좌에 떡 앉아 계신다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시는 데 얼마나 엄중한 천법이 있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그저 그리움에 취해 가지고 어떻게 할 때는 그것이 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법을 넘을 수 있는, 그분에 대한 사무침이 극해 가지고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 전체를 덮고도 남을 수 있는, 공인될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옛날에는 누워서는 기도 안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드러누워서도 기도를 곧잘 합니다. 눈을 슥 감고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비로운 경지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드러누워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정색을 하고 예법을 갖추어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될 텐데 드러누웠다' 하는 인식이 있을 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누웠다는 인식이 없는 경지, 별천지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하여 무엇을 먹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어디로 가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몸뚱이는 드러누워 있지만 무사통과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왜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사망선을 자유롭게 넘나 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게 될 때는―여기서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가슴 깊이 파고들어가더라도 남자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해요? 환영하지요. 남자도 그런 거라구요. 천만세의 담이 막혀 있다 해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담이 있더라도 그 담을 무난히 헤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체를 투입하고 달려드는 거기에서는 그 어떤 담도 전부 무너지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애기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헤치고 파고드는데 사랑을 빼놓고 보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애기에게 부모의 사랑을 촉감시키고, 애기를 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보다도 천지가 모두 평화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전체 분위기에 좋은 것이 싹튼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는 그 애기가 아무리 자기의 가슴을 파고든다 하더라도 그걸 용서하고 `어서 해라, 어서 해라' 할 수 있는 아량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기는 부모의 원수라구요. 호스를 갖다 대고 자기의 피살을 빨아가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소망의 자극, 남편에 대한 새로운 자극 등, 그 애기로 말미암아 찾아지는 것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경지는 누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 절대적인 사랑에 결부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전체를 위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맹세하는 그 자리는 무엇보다도 강한 기준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 위에 서지 않고 그저 말로만, 또는 보고, 듣고, 약속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