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7권 PDF전문보기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

오늘 말씀 제목이 '섭리적 현시점'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이야기합시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책임져야 할 사명이 어떤 것이냐?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요? 원리를 통해서 알지요, 원리를 통해서 배웠지요? 배워서 안다고 하고 있지요? 사실 알아요, 아니면 그저 안다고 하나요?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예, 떠납니다' 하며 틀림없는 결심을 하고 고향산천을 떠났던 아브라함, 이는 확실히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겠다고 하는 자리예요, 아는 자리예요? 이것은 믿는 자리가 아닙니다. 믿고 알고 행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어요. 또, 노아 할아버지를 두고 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 '그럴까 말까' 하는 자리에서 행동했던 것이 아니라구요.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히 몰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벌써 알았다, 안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 믿고 안 그 기준을 그저 뭉개 버리려고 사탄은 백방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자가 될 수 있느냐, 불신한 조상의 후손인 인간이 영원히 틀림없는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시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대의 세계로 처넣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는 전부 다 죽고자 하는 거라구. '나는 뜻을 위해 죽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섭리적 시대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뜻과 더불어 이미 죽었다' 이러지 않고는 사탄의 참소를 받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언젠가는 가다가 꺾이게 마련이라는 거예요. '늙어서 죽는 것보다 젊어서 죽으면 더 보람 있겠소'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나서게 될 때가 몇 살이었습니까? 서른 살이었지요. 서른 살이면 꽤 늙었어요, 젊었어요?「꽤 젊었습니다」 꽤 젊다니, 싱싱하게 젊었지. 그런 사람이 떡 나타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어야 해요, 안 되어야 해요? 예수 앞에 집안 식구가 원수예요, 원수가 아니예요?「원수입니다」 원수라는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니 그 나라의 백성도 원수요, 그 나라의 주권도 원수요, 전부가 원수라는 겁니다.

원수의 나라요, 원수의 주권이요, 원수의 백성이요, 원수의 땅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뜻을 이룰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이북의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뜻을 가졌다면 자기가 살겠다 해 가지고 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죽겠다고, 죽음의 길을 빨리 찾아 나서겠다고 하면 할수록 행동개시가 빨리 벌어지는 것이요, 길이 개척되는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아! 나는 살아야 돼'라고 생각한다면 행동하겠어요, 못 하겠어요? 행동 못 하는 거라구요.

그러한 비장한 예수님의 입장을 우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 하나님이 언제나 사랑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지, 편안한 자리에 가야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나라의 유대교도 원수요, 이스라엘의 모든 위정자들도 원수요, 로마도 원수요, 전부 다 원수인 판국에 홀로 나타나 가지고 나라를 뒤집어 놓겠다는 예수의 입장, 주권자를 돌이켜야 되고, 국민을 돌이켜야 되고, 국권과 국토를 돌이켜야 할 예수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살겠다고 하는 예수가 돼 가지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노골적으로 까놓고 이야기해 보자는 거예요.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묻혀진 사연을 헤쳐 놓고 말 못하는 예수요, 알기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결론만을 내려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늘을 걸어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막연한 결론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할 수 없는 예수가 아니냐. 그것은 당연한 말이라는 거예요.

젊디 젊은 예수가 말한 것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말이지요? 그렇지요?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실체가 성결되지 않는다, 그 말이 아니냐? 말만 그렇게 한 예수가 아닙니다. 말과 사정과 환경이 전부 다 그런 고독 단신의 입장에 세워졌던 예수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자! 그 자리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했으면, 뜻의 길이 생겨났을 것 같아요? 엇갈리고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다는 겁니다. 악의 세계에 몰려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다는 거라구요. 그래서 '끝날이 되면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가 복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은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개인을 구원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나라가 없이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기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2차적, 3차적, 4차적, 5차적, 6차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어 가지고 그 나라가 만일에 피해를 입을 위험한 자리에 있거든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나라가 없지요?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게 되더라도 입을 놀려 항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나라 없는 종족은 비참하다는 겁니다. 왜정 때 대한민국에서 났다 하는 사람들은 주권을 잃어버린 그 날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났다 하는 사람은 피를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왜?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났다 하는 사람은 피를 흘리는 것이 원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