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더라도 하나님의 사상과 이상을 남겨 놓고 죽어야 했던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7권 PDF전문보기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상과 이상을 남겨 놓고 죽어야 했던 예수

그러면 섭리적 현시점이라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이 우리 통일교회시대 말고 예수시대에 딱 갖다 놓으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예수 당시에 섭리적 현시점은 어떤 자리냐?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와 예수, 이 삼자가 서로 분리되는 현시점이 되어서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수도, 이스라엘 나라도, 유대교도 망하고 만다는 거예요. 예수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되는 것이 예수 당시의 섭리적 현시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현시점에서 분리되기를 절대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바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의 섭리적 현시점을 두고 볼 때는 셋이 하나되는 것을 최고로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바래왔느냐? 4천년 동안 하나님은 바라고 나왔던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거 틀림없지요?

그것을 위해서 아담 이후 4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 나왔던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이때를 이어놓기 위해서 피어린 죽음길을 극복하면서 싸워 나온 것이요. 아브라함도 이 전통적인 길을 남겨 놓기 위해서 이국 땅을 넘나드는 집시 생활을 모면하지 못한 것이요, 모세도 이 길을 민족적으로 넓히기 위해서 이방 나라의 궁중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어려운 길을 자처해 갔던 것이니, 애급 나라의 호화찬란한 궁전 이상가는 소망의 궁전을 바라보며 그런 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겠느냐. 이러한 모든 역사적인 시점을 예수 당시의 그 현시점을 두고 볼 때도 하나님이 원하는 그 환경과 때로서 수습될 수 있는 귀결점 하나를 바라보면서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완결할 때 역사는 승리의 역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아가 실패했더라도 그것은 성공의 대가를 지닐 수 있는 실패로 등장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이 아무리 수난길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영광을 상정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현실의 시점, 새로운 문화창건에 있어서 천국의 전통으로 남아질 수 있을 것이 아니냐, 천국 백성의 전통으로 남아질 수 있는 좋은 역사적 기준이 될 것이 아니었더냐.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궁중보다도 하늘의 궁중을 그리워하던 마음을 중심삼고 뜻이 이루어졌다면, 여기에서 비로소 몇천년 소원해 온 뜻이 꽃과 같이 활짝 피어 가지고 만국을 향하여 향기를 풍겨낼 수 있는 이상적인 궁전이 벌어졌을 것이 아니었느냐. 또, 세례요한의 30여 생애에서 비참했던 모든 운명과 조롱받았던 나날들…, 그 서러움이 비로소 여기에서 해소되어 도리어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자극적인 조건 들로 등장할 것이 아니었더냐.

그러나 예수 당시의 현시점이 그 모든 것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기점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생각지 못했고, 유대교도 생각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고대했지만 고대한 사람 가운데 그 어느누구도 그때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고 온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되느냐? 그것만 가지고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터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는 있게 마련입니다. 때를 찾아 세운 것은 한 개인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때를 아무나 대신할 수 있다면 자기 혼자도 때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혼자 개인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때, 하나님 앞에 사랑의 아들로서 세워질 수 있는 때는 언제나 갖고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기반으로 한 권내에서 종족과 가정들을 연결시킨 개인적인 평화의 터전을 갖는 때라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가 갖추어야 할 때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 앞에 백 번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예수를 모시는 백성이 있다면 그 백성도 하나님께 천번 만번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하늘 앞에 백 번 감사할 수 있는 자연적인 환경의 터전을 갖게 되고 성취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됐다는 거예요. '아바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이것은 비참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비참한 기도였습니다.

그 시간은 역사시대에 나타나서는 안 될 비참한 사연이 엮어지는 절박한 순간이었고, 절박한 찰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 찰나를 잃어버리게 될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늘의 뜻이고 예수의 뜻이고 무엇이고 다 쓰러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2차 타락과 마찬가지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려던 이상 전체가 타락해 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비장한 순간이요, 비통한 찰나가 아니었더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아담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죽더라도 하늘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상과 이상을 남겨놓고 죽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민을 구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이상과 그 나라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섭리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깨져 나가는 찰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이어받아야 할 것은 나라요, 세계이기 때문에 그 나라와 세계를 이어받기 위한 자리에서 싸워야지, 실패해 가지고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 기준까지 다 없어져, 망해 떨어지는 나라를 붙들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에 갖출 수 있는 소망의 나라, 소망의 천국, 소망의 지상 천국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미래의 뜻이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찾아 나온 그 뜻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건국의 이념을 중심삼고 나오던 것이 아브라함의 뜻이지만 예수의 뜻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후에 갖출 수 있는 그 뜻을 바라면서 예수는 담판기도를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예」 그 나라는 망하지 않아야 됩니다. 망하지 않고 영장 가운데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국을 기반으로 해서 로마제국과 세계를 하나의 평화의 천국세계로 만들어 통치권을 갖추어 가지고 이것을 이상적인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봉헌해 드리려는 것이 예수가 바라는 뜻이지, 십자가에 쫓기어 이스라엘 민족이 자랑하는 유대교나 이스라엘 민족이나 로마 제국의 치리하에 있는 그 나라를 봉헌해 드리려는 것이 예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