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내 뜻이 생겨났는가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59권 PDF전문보기

어찌하여 내 뜻이 생겨났는가

지금까지 타락의 역사시대를 지내오는 동안 어느 한때 하나님의 해방을 부르짖고, 그러한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배양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 같은 양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거 비참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내 뜻이 생겨 났느냐는 것입니다. 내 뜻이 따로 있었다 이겁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화합해 가지고 하나되어 있었다면 그 뜻은…. 바른발이 가면 왼발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뜻이 없다, 둘이 같은 뜻이다, 그렇게 되어야 할 텐데 왜 내 뜻이 있게 되었느냐? 이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냐? 비참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부처끼리 살면서 부인의 뜻, 남편의 뜻 해 가지고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의 뜻도 있지만 내 뜻도 있소. 당신의 뜻은 크고 내 뜻은 작지만 요만큼이라도 내 뜻이 있소' 하게 되면 남편이 진정 기쁘겠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라구요.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라면 남편을 대해 '당신의 뜻이 내 뜻입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 '옳소' 해야 아주 개운하게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은 아흔 아홉이지만 내 뜻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아흔 아홉 개의 뜻은 잃더라도 내 뜻 하나는 줄 수 없소' 한다면, 그 하나의 뜻은 아흔 아홉의 뜻보다 더 크고 백보다 더 무서운 뜻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가 우리 신앙노정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 뜻이 왜 생겨났느냐? 예수님은 타락한 세계를 구원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으로서 인간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이 다른 것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여실히 증거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해 주어야 할 대표자이니만큼 하나님의 뜻을 위주하여 하나되어야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을 쓸어 버린다면 언제나 하나될 수 있지만 이것을 붙들고는 하나될 수 없는 비통한 자리에서 있는 입장임을 직고하는 말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자니 인간을 버려야 되겠고, 인간을 존중시하려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비참한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냐? 그 자체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의 와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실을 직고한 것이 아니냐? 그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요. 뜻의 길을 가려면 그렇지요? 뜻의 길을 가려면 세상이 붙들고 잡아당깁니다. 그와 마찬가지예요. 뜻의 길을 가려니 남과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일체가 다르다구요. 일체가 다른 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거라구요. 그런데 전진했다가 급히 돌아와 가지고 수습해야 합니다.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야지 길게 될 때는 나간 것보다 더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려갔다가 벼락같이 와서 수습해 가지고 본연의 자리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있다가는 이 신앙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해요? 행복한게 아닙니다.

통일교회 신도들도 비참하다는 거라구요. 뜻을 알고 났으면 그 자리에서 플러스될 수 있는 행복의 여건이 사방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는 않고, 거기에 있다가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니 이게 죽을 지경 이라구요. 뜻을 몰랐다면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을 텐데 말이예요. 주위를 가만히 바라보니 식구들은 다 뛰고 있다구요. 같이 출발했는데 나 혼자 처져 가지고 있으니 마음까지 편하지 않다구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아이구! 내가 통일교회 원리를 듣지 않고,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죽이나 좋았겠나' 하는 고통 가운데 있다구요. 여러분의 입장은 예수님의 입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고 직고하던 바울의 신세와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면 인간세계를 포기해야 되겠고, 인간세계를 붙들려면 하늘세계를 포기해야 되겠으니, 이 두 세계를 조정하는 배우 노릇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얼굴의 배우가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이 인간세계를 중심삼으면 이는 꺼꿀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갔다가는 복달불나게 다시 돌아와 수습해 놓고 가야만 정상적인 신앙길을 조금이라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