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역사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1권 PDF전문보기

아벨의 역사

이러한 전통적 역사를, 이러한 심정적 경로의 역사를 이루고, 타락의 경로의 역사를 뒤집어 박으려니 아담 가지고는 안 되고, 해와 가지고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동생이면 동생, 그 누가 나와 가지고 그 이상 비참한 자리에 나서겠다, 아버지 이상 비참하고, 아들 이상 비참한 자리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칠 수 없으니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벨의 역사가 아니냐. 하나님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역사를 남겨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야말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서만이 수습된다는 원칙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아벨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누구냐? 또 다른 가인이나 또 다른 아담으로서 나선 아들, 하나님의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선 자가 아벨이 아니냐. 그 아담의 자리를 역사적으로 세계를 대표해 결실한 자가 예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둘의 책임을 진 것입니다. '나라와 세계를 대신해서 나를 쳐 주소서' 이게 예수의 사정이라구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모든 쓰라림을 대신 지고 내가 여기서 대를 잇겠습니다' 한 자리가 예수의 자리가 아니었더냐? 여기서부터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다른 차원에서의 방향과 요인이 여기에서 개척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거쳐온 아벨적인 순수한 유래를 갖춘 전통적인 역사로 보게 될 때에, 과연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 엄숙한 6천년 역사 앞에…, 6천년이라구요, 6천년. 그런데 사실 6천년만 되나요? 그 역사 앞에 그러한 순수한 입장에서 메시아 이상의 내정의 심정을 가지고, 메시아는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그런 놀음을 했지만, 나라와 가정을 뒤에 놓고 그런 놀음을 할 수 있으면 그게 불행한 것이냐? 불행한 것 같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 동참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불행한 자가 될 것이냐? 그 자리에 선 것이 불행한 것 같고 비참한 것 같지만 비참한 것이 아니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행복의 요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역사는 그들로 말미암아 찬란한 승리의 역사, 다른 방향의 기독교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라구요. 마찬가지라구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입장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대신 부모를 그렇게 놓고 처자를 그렇게 놓고 그 처자, 부모와 하나된 자리에서 나라를 붙들고 호소하고, 혹은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자기 뜻에 대한 운명의 길을 붙들고 책임한다 할진대는 하나님은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기대하실 것이냐? '너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원이 성취될 것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벨의 역사를 사랑하고도 빛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꽃을 피워 가지고 그 미를 사방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거기 꽃 가운데 품겨 있는 향기를 사방으로 발산할 수 있는 좋은 찬스가 아니냐. 장미는 건드려야 향기, 향취가 나는 것이 아니냐. 마찬가지 이치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