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없는 심판을 감사히 받아야 부활의 기준에 설 수 있다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66권 PDF전문보기

역사에 없는 심판을 감사히 받아야 부활의 기준에 설 수 있다

여러분은 이 복귀라는 말을 생각하게 될때, 복귀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현재의 타락한 내 자신을 인정할진대는, 복귀라는 말은 내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입장 그냥 그대로 적응해 가지고 내일에 연결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완전히 청산짓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통해서 내일의 경계선을 넘으려면 반드시 그냥 그대로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일대의 혁명이, 일대의 파탄이, 일대의 개혁이 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내 자신에 있어서 그러한 작용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면은 파탄이요 일면은 희망적인 그런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파탄은 오늘과 더불어 청산하고 희망은 내일과 더불어 성사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어떤 자리냐 이거예요. 그런 자리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를 희생시키는 자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희생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까지 희생시키느냐 하면 '나는 역사이래 다시 없는 죄인이다' 하는 자각을 할 때까지입니다. '나는 역사에 없는 죄인이니 벌을 받아야 된다. 역사에 없는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자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박한 공포심을 내가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 절박한 자리를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하는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잘못을 짓고 죽는 것이 원통하오니, 당신이 모든 것을 허락하실 수 있다면 이것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며 눈물을 흘릴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갖고 회개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천대받고, 어떠한 취급을 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받아야 할 심판이 공포의 심판이라 하더라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심판받는것은 마땅하지만 당신에게는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일이 조금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기를 중심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 슬픔을 자기를 중심삼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동정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발발하고 출발해야만 회개의 기준을 넘어설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 나는 망합니다'라고 동정을 바랄것이 아니라 '나는 망해도 좋소. 그러나 당신은 해방을 맞고 당신은 기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새로운 희생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수천 대의 선조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선조들의 잘못한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시대 요럴 때는 너의 선조가 잘못했기 때문에, 너도 그런 선조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틀림없이 그런 일을 하게되면 잘못할 거야. 또 반대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더라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어떠한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적 선조를 대표해서 심판의 자리를 대신 짊어지고 그러한 심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나는 고통스럽고 나는 망하더라도 하나님은 고통받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은 망해서는 안 된다는 이러한 갈구와 소망의 기준이 있어야 하늘과 땅, 나와 하늘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그 가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보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할 수만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것은 나는 천번 만번 죽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부활의 기준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만일에 부활된 예수에게 또 죽으라고 했다면 어떻겠어요? 또 죽을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지면 어떠할 것인가?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슬픔이 계속되고 당신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내가 기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 내가 부활된 자로서 기뻐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역사와 더불어 희생할 것을 각오하고 그 결의를 다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데에서만이 역사적인 기독교는 부활돼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예수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명을 다하고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고 말을 한 것은 당연한 말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