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로서 의롭고 비참하고 억울한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95권 PDF전문보기

메시아로서 외롭고 비참하고 억울한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

그럴수록 예수는 외로우면 하나님 앞에 기도한 거예요. 그럴 적마다 하나님은 가르쳐 줬을 것입니다. '너를 앞으로 이런 사람으로 내가 만들 것이고, 너는 이렇게 돼야 되고, 이스라엘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고, 세계를 어떻게, 로마제국을 어떻게 해야 된다' 하고 전부 다 가르쳐 줬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는 '하나님은 우리 어머니보다도 낫고, 우리 아버지보다도 낫고, 동생보다도 낫고, 우리 나라보다도 낫고, 친척보다도 낫다. 내 친구다. 내 생명의 은인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외로워 가지고 눈물을 많이 흘리고, 그렇게 심각한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면 말이예요,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의 비참한 걸 볼 때 그 생각이 없었겠어요? '하나님이시여!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고, 우리 나라가 바라는 메시아는 언제 옵니까?' 이렇게 기도를 해봤겠어요, 안 해봤겠어요? 그럴 때 '네가 메시아가 돼야 된다' 하는 명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돼야된다' 하고 한 번 얘기할 때 그걸 예수가 믿었겠나요? 남이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은 그를 메시아로 믿게 하기 위해서 생활 가운데서 여러 가지 믿지 못할 약속, '내일은 이렇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언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해 가지고 생활하는 가운데 부정할 수 없게끔 많은 증거적 체험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믿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었다구요. 묵묵히, 말없이 속에다 간직하고 그 내적 수련을 해 나오는 기간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가 몸을 쓰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가정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가, 혹은 선생이 모든 나라가 전부 다 자기를 위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전부가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반드시 자기를 통해서 메시아적인 사명을 하게 하실 때, 개인, 가정, 종족, 민족이 전부 다 자기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모심을 받을 수 있는 한날이 있기를 바랐겠나요, 안 바랐겠나요? 원했을 거라구요. 그런데 교회와 유대 나라와 세계가 그렇게 돼 있었어요?

그런 소망을 품고 예수가 30세가 되어 가지고 새로운 복음을 중심삼고 유대교와 세계에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게 될 때, 자기를 전부 다 환영하고 그 누구보다도 존경할 수 있는 입장이 돼야 그런 것이 가능할 텐데 반대했습니다. 반대를 했다 이거예요.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안 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갈 때 '아, 내 행복한 십자가여' 했겠어요? 하나님이 볼 때 '아, 예수가 잘 죽는다'라고 생각했겠어요, 원통하고 기막힌 십자가로 생각했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자신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 가지고, 그렇게 한때 갖고 있었던 희망조차도 몽탕 전부 다 끊겨져 가지고 절망 가운데 죽어가는 그 입장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좋아하셨겠어요?「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비참한 자리에서, 억울한 자리에서 가는데 거기에서 무슨 구원의 도리가 생겨요? 희망의 세계가 생겨요? 희망의 길이 생겨요? 어림도 없다 이거예요. 자신은 억울하고 분통해서 죽겠는데 '너희 집에 복이 온다' 이런 말이라도 할 사람 있어요? 어림도 없다구요.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뜻에서 이탈됐는지를 알고 각성해야 돼요. 4천 년 동안 유대교를 만들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든 것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고, 예수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왔고, 죽을 놀음을 하기 위해서 왔다는 그런 엉터리없는 얘기는 다 집어치우라는 거라구요.

그런 관점에서 죽었다가 다시 와야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갈 때, 예수의 원통함과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의 올무가 거기에서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예수가 구름을 타고 와 가지고 그 한을 이 땅에서 풀 수가 있어요? 허깨비가 뭘하겠어요? 있을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날 전세계, 미국도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문전에 축하 트리를 만들고 무슨 뭐 야단하는 걸 하나님이 볼 때 참 자랑스럽다고 하고, 예수가 볼 때 '아이고, 내가 죽기 위해서 태어났던 날을 축하해 주니 고맙다' 이러겠어요? 도리어 자극되는 날이예요. 이 땅에 태어나 실패한 것을 자극시키는 슬픔의 날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