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27권 PDF전문보기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그러므로 거기서 어떻게 완성 주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이 무엇이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신의 유무에 대한 것을 돌파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진짜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 말이예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는 분이 무슨 사랑이 필요하겠느냐 이겁니다. 그렇지만 딴것은 다 가능해도 사랑은 혼자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 요건을 갖추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혼자 있어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가씨들도 그렇지요? 아가씨들도 전부 다 자기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 같지만, 때가 되면, 사춘기가 되게 되면, 상대를 보게 되면 속에서 꿈틀꿈틀 하고 그런다구요. 야릇하게 얄궂은 주파가 생겨나고 파동이 벌어진다구요. 그렇잖아요? 그 사랑이 어디서 왔느냐 이거예요.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주 맥박 가운데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자기 것이냐?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운반 장치다, 운반 장치요 작동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자신도 사랑이 있지만 사랑이 있는지 모른다 이거예요. 혼자 있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쁘장한 미인도 혼자 앉아 가지고 '아이구, 내 사랑, 새빨간 사랑이 속에서 불탄다'고 그래요? 그저 바람벽만 보고 한숨만 쉬고 있지요. 사랑은 상대가 나타나야만 작동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상대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본질적 상대권은 본질적 남성, 본질적 여성을 말합니다. 그 본질적 여성과 본질적 남성은 신과 상대할 수 있는 가치적 내용을 자연적으로 지닌 본질적 남성, 본질적 여성입니다. 이렇게 전부 다 이론적으로 정리해 놓아야 된다구요. 우주의 중심이 인간이라면 이 우주 전부를 거느려 가지고 본질적 사랑, 피라밋 꼭대기에 서 가지고 '태양이여, 빛나소' 이러지 않아도, 그 꼭대기에 서게 되면 거기서부터 빛이 비치게 되어 모든 것이 불탄다는 거예요. 그거 뭣이라고 해요? 볼록 렌즈 같아 가지고 말이예요, 햇빛을 집중시켜 놓으면 불이 생겨나 타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불이 탄다는 거예요. 아무리 빙석 같은 것도 대번에 녹아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힘 가지고는 녹이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원수의 찬 가슴도 녹이고 남을 수 있는 것이 참사랑이라 하더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사랑의 본질을 어디서 느끼느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는 것은 뭐냐? 자아주관의 정착점을 찾지 못하면 주관 못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콘트롤하려면 콘트롤할 기준이 있어야지요. 기준이 있어야 정상적인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없어 가지고는 정상적인 인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관, 보는 시각이 옳아야 되고, 듣는 청각이 옳아야 되고, 냄새 맡는 후각이 옳아야 되고, 미각이 옳아야 되고, 촉각이 옳아야 된다. 이거예요. 그게 정상적이라구요.

우리 인간은 이중구조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 이 두 세계의 매개체로서의 공명체로 생겨난, 그런 입장에 선 자아의 자체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의 자극을 나 혼자 느낄 수 없으니,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순수하니 무한 순수인데, 나와 어떻게 다르냐? 그런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요. 하나의 주체로서, 주체자로서, 아버지로서, 사랑의 주체로서 접근할 수 있는 거기에서 나와 그에게 미쳐지는 작용이 체휼인데, 이 체휼이라는 것은 한번 느끼면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뭐 좋았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지요? 명꿈이라고 해 가지고 한 번 꿈꾸면 잊어버리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명꿈 이상의 몇십 배 몇백 배 고도의 사랑의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체험은 영원히 물고 들어갈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인식의 주체성,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