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식구를 이루기 위해 참부모로 오신 예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156권 PDF전문보기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식구를 이루기 위해 참부모로 오신 예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내가 대신 역사적인 하나님을 체휼하고 시대적인 하나님을 체휼하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모든 내용을 체휼하여 과거를 이끌어 세우고 현실을 수습하고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내 자신이 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또,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에 왔다 갔던 저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재차 수습하고, 예수와 성신이 영계에 가서 현세에 섭리하시는 그 모든 것을 상속받고, 앞으로 이 땅 위에 올 메시아의 터전을 대신 닦기 위하여 수고하여야만, 여러분들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섭리하신 하나님 아버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섭리하신 천지의 주인이요 미래까지 섭리할 구세주 앞에, 여러분들이 자녀가 될 수 있고 식구가 될 수 있고 형제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가지고 역사는 역사대로 시대는 시대대로 갈라놓고 나쁜 역사는 심판해 버리고 나쁜 현세도 심판해 버리고, 과거의 좋은 것은 끌어다가 현세에 세우고 현세의 좋은 것은 역사적인 교훈과 결부시켜 가지고 내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주체가 되지 않고는 미래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누구로 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왔고, 하늘의 참된 형님의 사명을 하기 위해 왔고, 하늘의 참된 식구의 사명을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가 이 땅 위에 와서 한 것이 무엇이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슬픔과 역사적인 하나님의 수고와 뜻 앞에 있어서 하늘을 대신하여 남겨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수습해 놓고 그 시대 시대에 하늘이 원치 않았던 모든 조건은 제거하고 하늘이 원하는 것만 남겨 가지고 이 둘을 합하여 새로운 천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참다운 자녀가 되고 참다운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구를 위주로 한 참다운 자녀냐 하면 하나님을 위주로 한 참다운 자녀요, 누구를 위주로 한 참다운 형제냐 하면 예수님을 위주로 한 형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픈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면 나도 기뻐하는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예수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는 자리에 나가야 되겠고, 예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한 개인적인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을 지나 국가를 지나 온세계를 통하여 그와 같은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적인 하나님, 역사적인 구세주 앞에 혹은 역사적인 참부모 앞에 내가 자녀로 설 수 없고 형제의 인연으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이와 같이 참다운 하나님 앞에는 자녀요, 하나의 주님 앞에는 형제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그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옛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가 되어 예수님을 위주로 한 참다운 형제를 모집하기 위한 것이 구원섭리인 것을 알았기에 예수를 위주한 생활 전체를 내가 대신 상속받아 가지고 실천해 나가지 않고는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없고, 참다운 식구가 되지 않고는 참다운 형제가 될 수 없고, 참다운 형제가 되지 않고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왔다 갔던 예수는 역사적인 조상으로 왔다가 사라져 버린, 지나가 버린 주님이 아니라 그 뜻을 오늘 현세의 우리들에게 상속해 놓으셨습니다. 그 상속받은 뜻을 오늘날 우리들이 재현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의 입장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상속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비로소 참부모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대신 사명을 오늘날 이 평면적인 세계 전 30억 인류 가운데 이루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어 놓지 못한다면 재림의 뜻은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