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왔던 예수님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19권 PDF전문보기

외로왔던 예수님

남자는 수천년을 통해서 왔지만─찾아진 아담의 신부는 하루 아침에 천지의 대위업을 파탄시켰기 때문에─여자는 그 복귀에 있어서도 일대에 사탄세계를 전부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탕감조건을 해와에게 전부 연결시켜야 합니다. 해와는 일생 동안 그것 들을 탕감해야 합니다. 뜻을 모르는 자리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뜻을 알아 가지고 일대에 이것을 넘겨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해와가 당초 아무것도 모르는 자리에서 사탄의 말을 듣고 타락했던 것을, 본연의 남편의 말을 듣고 복귀했다는 뜻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아 예수님의 신부의 입장을 책임질 수 있는 여성이 그 당시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천년 역사를 수습하고 그 역사의 한을 해원성사하여 만민 앞에 해방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입니다. 그런 예수님이니 뜻을 대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천지를 한꺼번에 움직이고 옮기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행동를 옮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대될 수 있는 이스라엘이 어디 있었습니까? 잘났다는 교법사, 제사장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반대하기에만 급급하고 자기들이 잘났다고 법석을 떨면서 모두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소망의 닻을 내려야 할 이 땅위에 소망의 닻을 내리기는 커녕 패망의 닻을 내리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한 운명에 부딪쳤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 찾아가신 예수님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아버지!' 하고 부르던 그 기도는 4천년 역사를 꿰뚫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과 피와 땀과 눈물어린 기도였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은 공연히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쓰러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이 나는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그러한 심정 앞에 태산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신념을 갖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시대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이 교훈을 잘못했다고 봅니다. 너무 사랑만 많았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제자들 편이었습니다. 밀밭을 지나다 밀을 비벼 먹는다고 바리새교인들이 비난을 하는데도 제자들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공인도 유대교단의 공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족장들에게도 공인받지 못했습니다. 더우기 자기 가정, 즉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셉 가정에서조차도 몰렸습니다. 가정에서 몰리고 제자들에게까지 배신당하신 예수님은 갈 데라고는 십자가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올 이스라엘의 해방의 날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사정을 다시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하지 못하면 망합니다. 예수님은 죽어 가면서 가정의 기준을 후대의 약속으로 남기셨습니다. 갔다와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